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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현장이야기

4월 17일(수)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아브라함 카이퍼)를 다시 읽고
(캄보디아의 신년 쫄츠남 공휴일 이어서 종일 책을 읽고 일부를 발췌해서 올립니다.)

예술, 음악에 대한 부분(발췌)
예술적인 본능은 보편적 인간 현상이다. 국가 형태와 풍토와 나라들에 따라서 그 예술적인 본능의 발전 정도는 차이가 난다. 인간 삶 속의 모든 기능들이 인간의 보편적인 발전을 위하여 적당한 비율로 협력할 때에만 더 고상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모든 예술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 신적인 창출로 존중해야 한다. 음악은 마음을 감동시키고 마음의 성향과 도덕을 고상하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다. 음악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즐거움을 위하여 베풀어 주신 탁월한 은총이다.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상실된 아름다움의 산물이 어떠하였던가를 상기시키고 앞으로 올 완전한 아름다움의 영광을 예기하는 신비로운 사역을 갖고 있다. 가인의 후손에게 재능을 주신 것은 예술의 가인적인 성질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가장 높은 은사를 상실한 사람이라도 최소한 그보다 못한 예술의 은사를 통해서 신적 풍성함을 나타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술적인 아름다움은 우리 자신의 공상의 산물이나 주관적인 지각의 산물이 아니라 객관적인 존재로서의 신적 완전을 표현한 것이다. 예술적 본능은 천성적인 은사이며 죄에도 불구하고 일반은총이기 때문에 인간 본성에 있어서 계속 빛을 발하는 탁월한 은혜에 속한다.

선교에 해당하는 부분(발췌)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를 온전케 하시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 그러나 그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요점은 구약성경을 철저히 의지하여 자신이 하나님이며 중보자라고 선포하며 자기 피로 죄 사함을 받는 것과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에 대하여 선언하신 점이다. 잘 규정된 복음을 전하지 않는 한 어떻게 계속해서 선교를 실행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기도하라. 순교자들은 신비주의나 박애주의적인 사업계획을 위하여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 믿음을 받아들이고 오류를 물리친다는 확신을 위해서 피를 흘린 것이다. 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특권이다. 시대의 조류를 바꿀 수 있고 세상 정신에 하나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힘 있는 말은 모호하지 아니하고 분명한 양심의 비전에서만 나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진리라고 고백하면 그 사람은 그 진리를 말과 행실과 전체 삶의 방식을 통해서 실천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예정, 선택, 경륜에 대하여(발췌)
예정을 믿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개인생활에 하나님의 경륜이 침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경륜의 뜻을 자신의 존재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단순히 말로 고백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생과 장차 오는 내생에 관한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견고히 설 의향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뜻과 하나님의 역사의 확실성에 대하여 우리가 정직함과 확고부동한 의지에 대한 증거이며 극히 용기 있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예정이 만물의 존재와 과정, 전 우주가 법과 질서를 따르고 자연과 역사의 진행에 있어서 견고한 의지가 존재한다는 확신이다. 우주는 돌무더기를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것이 아니라 엄격하게 일관성 있는 체계로 세워진 기념비적인 건물을 연상시킨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모든 도덕적이고 영적인 법칙의 견고한 기초와 기원을 발견한다. 영적인 법칙뿐 아니라 자연의 법칙도 다 함께 높은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 그 질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존재하며 그 높은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 그것은 그의 영원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계획의 완성을 통하여 성취될 것이다.

칼빈주의에 대하여(발췌)
칼빈주의는 어떤 천재의 제단에서 향을 피운 적이 없다. 기념비를 세운 적도 없다. 영웅들의 이름을 따서 부르지도 않는다. 제네바의 한 벽의 돌 하나만이 남아서 칼빈의 이름을 생각나게 한다. 사람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위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칼빈주의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전체 인생을 직접 하나님 앞에 놓기에 필연적으로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약한 자나 강한 자, 둔한 자와 재간 있는 자를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타락한 죄인들로 보고 누가 우리 위에 주인 노릇을 한다는 말을 못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게 서서 서로 동등하게 된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차이 밖에는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모든 뻔뻔스러운 노예제도와 카스트 계급제도를 정죄할 뿐 아니라 사람들 중에 존재하는 특권적인 계급을 반대한다.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다음에 이웃을 바라보는 것이 칼빈주의의 추진력이요 칼빈주의가 취하는 지성과 영적인 관례다. 이 거룩한 하나님에의 두려움과 하나님 면전에 연합하여 함께 서는 자세로부터 더 거룩한 민주주의 개념이 발전하였고 그 터가 굳어졌다. 칼빈주의에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공동의 열심에 사로잡힌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인생이 엄격한 복종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드려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래서 밀실이나 방이나 교회 속에서만 존재하는 종교를 혐오한다.
칼빈주의자에게 교회는 그 본질에 있어서 영적인 유기체로 하늘과 땅을 포함한다. 교회는 신앙을 고백하는 개인들 자신들 속에서 발견된다. 각각 떨어진 한 개인 속에서가 아니라 그 개인들이 연합하여 함께 모인 속에서 그들 자신의 취향대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규례를 따라 교회를 발견한다. 지상의 교회는 마치 기계처럼 은혜를 만들어 나누어 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다. 어떤 건물이나 제도나 영적인 한 계층이 아니다. 오직 중생하여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만 있다. 성경의 명령을 따라 구원론적 요소의 영향을 받아 한 공적 모임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왕인 그리스도께 복종하면서 함께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뿐이다.
칼빈주의는 신자를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개인적이고 가정적이고 사회적이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면전 앞에 세워 두는 것이 특징이다. 칼빈주의자는 자기 인간적 존재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는 긴 여정을 걸어가는 매 걸음마다 그렇게 엄위로 충만하신 하나님, 자기의 여정이 다 마칠 때 그를 기다리고 계실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순례자이다. 그는 하나님 면전 앞에 있고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기의 전 존재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자연과 자기 몸과 자기 이성과 행동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결코 침묵하지 않는 “너는 ……할찌니라”라는 소리로부터 귀를 뗄 수 없다. 그러므로 참된 칼빈주의자는 벗어 던지고 싶은 멍에와 같이 억지로 그 규례들을 지키지 않고 사막에서 안내자를 따라가는 것 같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 규례들에 자신들을 맞춘다. 안내자의 뒤를 바짝 쫓아가는 것 외에는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과 같다.
칼빈주의자는 정상적인 생활을 방해하는 무엇이든지 힘을 다해서 재빨리 제거하여 자신의 영적인 호흡을 회복시키며 하나님의 도덕적 명령에 따라서 회복시키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회복될 때에만 내적 생명이 다시 영혼 속에서 자유롭게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새롭게 된 활력있는 행동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는 보편적인 도덕적 규례들과 특별한 기독교적 계명들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칼빈주의자는 양심에 자신을 복종시키지만 그 양심을 모든 사람이 자신 속에서 행해야 할 것을 정하는 개인적인 법 제정자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내밀한 사람을 격동시켜 하나님의 판단에 복종케 할 때 사용하는 직접적인 신의식으로 보고 양심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숭앙 그 자체가 모든 영적 활동의 동기들이다. 언제나 모든 만사에 항상 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가장 깊고 거룩한 경외심을 삶의 법칙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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