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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현장이야기

캄보디아도 5월 1일이 노동절이어서 공휴일입니다. 신년 연휴였던 쫄츠남(4월 14-16일)에 아브라함 카이퍼의저서인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를 읽었고 오늘은 프랭크 개블라인의 저서인 ‘신본주의 교육’을 읽었습니다. 선교지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책들입니다.

캄보디아에 온지도 6개월이 지났습니다. 한국에서 목회를 하면서 선교에 대하여 생각했던 것들과 선교지에 와서 선교사들을 대하며 듣고 보면서 느끼는 것들 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동안 욕심이 앞선 나머지 작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면서 제 스스로 선교에 대한 가치관 재정립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혼란과 고민들을 정리하는데 두 책은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여 20여년 만에 다시 정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위의 두 책은 저의 신학생 시절과 목회 초기에 읽었던 책들입니다. 그 당시 저는 두 책을 통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신학생으로서, 전도사로서, 그리고 목회자 후보생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기독교교육에 대하여 성경적인 원리를 잘 배운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자주 권하고 선물했던 책이기도 합니다.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부분들을 발췌하여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로 발췌한 문장들을 나열해서 문맥이 어색한 부분들이 있습니다만 문장 하나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드러내리라 생각합니다. 혹은 관심 있는 주제부분을 읽으셔도 좋을 것입니다. 더욱 바라는 것은 직접 책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이 책은 1954년에 쓰여진 책이고 1991년에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지만 현대사회의 종교적, 교육적 현실에 꼭 필요한 불변의 성경적 원리들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교지에서도 기독교교육의 원리가 더욱 더 필요한 것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읽는 중 내내 교육선교를 하시는 많은 선교사님들에게 꼭 권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고 몇 분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이 책에서 현대의 교육상황과 시대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교육은 진, 선, 미는 추구하면서도 성(거룩함)에 대하여는 고개를 돌려 버린다. 전반적인 사상적 분위기는 세속적이고 자연주의적이며 신본주의에 기초하지 않고 인본주의에 기초하며 거의 종교적으로까지 이상화시킨 민주주의를 교육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진지하고 깊이 있게 생각하기를 몹시도 싫어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천박성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 천박성은 갖가지 문명의 이기들을 조작하기에 바쁜 나머지 자기 스스로를 가꿀 틈이 없는 현대문명을 배양해 내었다. 텔레비전, 만화, 잡지 등은 깊이 있고 면밀한 생각을 하도록 북돋우지 못한다. 간결성, 능률성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슬로건이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는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넓혀주는 일에 대한 관심은 점점 시들해질 수밖에 없다. 오늘 날의 광고와 선전들이 지니는 가장 큰 특징은 영특함, 성적인 매력, 자존심, 속물건성의 부추김 등이다. 조작되고 연출된 거짓된 인상을 고의적으로 심어주려고 하기 때문에 빈번하게 진리를 모독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상황과 시대상황 속에서 세속교육(공교육)은 순수히 사회학적이며 자연과학적인 지식들을 토대로 그들의 교육을 통합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속교육은 여전히 구심점을 잃은 채 분열적인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교육은 학교의 교실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든가 학교의 담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은 교육에 대한 가장 널리 퍼져있는 오해중 하나입니다. 교육은 실제로 삶에 대한 우리의 경험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단절됨이 없는 폭넓은 과정이므로 청소년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그들을 교육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교육이론은 기독교의 가르침들이 세계관이자 인생관이지 인간의 삶이나 실제 세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단순한 교리들의 집합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해주려는 노력이다. 기독교는 삶의 모든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지식의 모든 영역, 삶의 모든 측면과 우주의 모든 사실들은 기독교 안에서 그 올바른 위치와 그 올바른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는 세상 전부를 남김없이 포괄하는 진리의 체계인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제시한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헌장은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진리의 한 측면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진리란 모든 참된 것들을 포괄하는 것이며 참된 것이라면 어떤 것도 기독교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진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원리가 지니는 포괄적인 특성은 한편으로는 지식을 세속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점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삶과 인식의 전 영역을 바울 사도의 표현과 같이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이 옳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의 진리는 반드시 행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진리가 가지는 이러한 특성은 그리스도의 속죄론에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속죄론이 이론에만 그친다면 비록 그것이 제아무리 옳은 이론이라 하더라도 단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속죄론의 효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갈보리 산 위에서 십자가에 매달림으로써 그의 속죄이론을 직접 수행 해내야만 하였습니다. 성경의 진리들은 모두 이와 같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우리의 삶에 연결될 때에만 진리로서의 참다운 효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교육이 ‘진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원리를 받아 들인다는 것은 말을 그렇게 할 뿐 만 아니라 행동도 그렇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속주의 속에서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둘러싼 세속주의의 물결이 얼마나 거대하고 광범위한 것인가를 깨닫고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단련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처럼 맹렬하게 파고드는 세속주의적 사고방식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 역시 극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사고방식 속에는 세속적 인본주의 철학이 우리가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기독교교사들의 경우도 그들은 거듭난 사람임에 분명하지만 그들이 하는 교육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인본주의라는 우리시대의 지배적 참조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굳어져버린 우리의 잘못된 태도를 근본적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사들은 지엽적인 문제들을 논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세속적 사고방식이 자신들의 마음에 어느 정도나 스며들었으며 자신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나 물들여 놓았는지를 연구해야 합니다.

거듭난 교사라고 해서 완벽한 기독교 세계관을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거듭난 사람의 마음 속에 오히려 하나의 싹이나 씨의 형태로 심기워집니다. 신앙의 측면에서 볼 때 거의 진보가 없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성경은 이런 사람을 어린아이라고 부릅니다.-일관된 사고체계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유치한 단계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계속적으로 성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독교세계관을 형성하는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인적인 연구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그 마음이 극도로 게으른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일 뿐 아니라 읽는 일까지도 전적으로 목사에게 맡겨버립니다. 이렇듯 간접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는 그러한 사고체계를 수립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비록 기독교사나 혹은 목사라 할지라도 자신의 매일매일의 삶을 성경에 기초하여 살아갈 정도로 성경을 자신의 삶과 마음의 중심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성숙된 기독교적 가치관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오스굳 교수는 현대에 만연해 있는 물질주의에 대한 해독제를 소개했는데 그가 제시한 해독제는 다름 아니라 위대한 시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에게 정통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서 그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십시오. 매일 같이 틈날 때마다 그를 생각하십시오, 할 수 있는 한 자주 그의 시를 조금씩이라도 읽으십시오, 그래서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그의 시의 한 부분을 당신의 삶의 한 부분으로 만들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당신은 그의 시 가운데에서 매일같이 새롭고 신선한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의 시를 읽거나 생각할 때마다 당신의 일상적인 삶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감정 그리고 새로운 방안과 새로운 측면들이 당신의 마음 가운데 샘솟듯이 솟아날 것입니다. 그의 시는 이제 당신의 인생을 쓰라리고, 케케묵고, 멋없는 것으로 만드는 어떤 요소라도 방지해 내는 해독제가 된 것입니다.’

기독교철학은 우리의 모든 생각들이 남김없이 기독교적이기를 요구합니다. 이러한 포괄성이 결여된 것은 기독교철학이 아닙니다. 기독교철학은 어지중간한 타협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사도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고후10:5)라는 바울 사도의 도전적인 말이 결코 공허한 말장난이 아니며 기독교 교육의 전반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고 또 실현 가능한 모범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모든 생각이 그리스도에게 복종된 기독교 교사가 성경에 젖어든 마음과 인성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기독교적 입장들과 견해들을 수업 가운데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것이 실제 교육현장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과에 유능할 뿐 아니라 성경도 잘 가르칠 수 있는 교사를 찾아내고 길러내는 일이 아주 중요합니다.

교육의 기술은 결코 쉽게 획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의 기술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여러 가지 어려움들은 뛰어난 천재성을 요구한다. 교육이란 다름아닌 영혼을 단련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교사들은 천재성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일을 하다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할 때에는 언제나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어김없이 주시겠다는 확실한 약
속을 주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수학과 기독교/파스칼은 ‘기하학자의 마음’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기독교적 사고의 틀과 수학(기하학)은 인식론적인 수준에서 공통적인 기반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었다. 기하학은 나름대로 명확하게 규정해 놓은 공리들을 자명한 진리라고 내 세우지만 기하학 자신의 힘으로 그것들이 진리임을 증명해 낼 수는 결코 없는데, 그 까닭은 기하학이 본질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한 것들에 그 기초를 두기 때문임을 간파하였다. 나아가서 ‘어떤 사건에는 그 사건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반드시 있다’는 인과론도 그 진리여부가 검증될 수 없는 주장이라는 현대과학의 견해를 예측하고 있다. ‘이 모든 기하학적 진리들은 결코 검증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진리들이 검증될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이 모호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명백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 진리들이 검증될 수 없다는 점은 결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탁월성의 징표가 된다’고 주장했다.

파스칼은 이러한 자명한 진리들은 직관을 통하여 발견된다고 했습니다. 마음을 통하여 본능적으로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이성으로써가 아니라 마음으로써 알아본다’고 하였습니다. 기하학에 대한 파스칼의 태도는 신학적 진리를 다루는 신학자와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기분적인 공리들도 역시 인간의 논리로써 그 진위여부를 검증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 공리들을 마음으로 느껴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일단 그 공리들을 신앙으로 받아들인 뒤에 그들을 좀 더 명확하게 규정하여 사용함으로써 기독교적 삶과 기독교적 인격이라는 무한한 영역에서 많은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공리들도 역시 논증할 여지없는 극도의 자명성을 지닙니다. 갈릴레오는 ‘자연이라는 위대한 책은 숫자라는 언어로 쓰여있다’고 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현의 길이와 장력 사이에 일정한 비율이 성립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만물은 수로 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문학과 기독교/문학작품들은 그 대부분이 마치 거울과도 같이 삶의 다양한 측면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들입니다. 기독교와 문학은 모두 인간성의 근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그 본성이 밖으로 표출된 인간행동이라는 문제를 다룹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감이라는 요소로 인하여 인간이 쓴 책과는 무언가 다른 책입니다. 온전함과 신실성을 가지며 신성을 지닌 책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모든 책의 모형일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책들의 진위와 선악을 밝히는 준거체계이기도 합니다. 사물의 본질에 관한 문제에는 이 책이 표준이 됩니다. 오늘날의 책들은 비록 아름다운 문장으로 치장되어 있지만 성경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입니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보다 더 높은 곳에 있습니다. 이 책은 생명의 책입니다. 이 책은 인간행동의 근원이 무엇이며 그것은 과연 선한 것인가? 혹은 악한 것인가를 밝혀 주는 도덕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죄인을 성자로 변화시키는 강한 힘을 가진 능력의 책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문제들로 가득 차 있는데 이 문제들은 위대한 작품들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야말로 양자택일의 절박성을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묘사한 책이며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 말미에서 현대의 어떤 심리학보다도 예리하게 인간의 본성을 통찰해 냈습니다. 기독교적인 입장을 떠나서 문학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것은 커다란 손실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현대문학이 죄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상실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음악과 기독교/음악은 아주 뛰어나 기독교 예술입니다. 음악은 영원한 나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입니다. 음악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를 잘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킴으로써 지금 이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음악이 종교상의 역할을 수행할 때에만 인간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음악작품들은 얼핏 보기에는 세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영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어거스틴은 ‘음악은 종교적인 신앙과도 유사하게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리의 영혼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생각을 아주 쉽게 불어넣어 주기 때문에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보에티우스는 ‘음악은 인간본성의 한 부분이며 우리의 인격을 향상시키기도 하고 타락시키기도 하는 힘을 지닌다’고 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은 인격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인격을 형성시키고 인격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무디가 이끄는 전도집회에서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부른 생키, 빌리그래함의 전도집회에서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부른 비벌리 쉐아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좋은 상태가 되도록 함으로써 나름대로 복음의 일꾼 노릇을 하였습니다.(추한 생키의 모습은 어느덧 사라져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는 소박한 음율로써 우리들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 진실되고 호소력있는 기독교인만이 한 사람 서 있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음악들 가운데는 값싸고 천박하며 그릇된 미적 감각을 지녔다고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많이 있음도 사실입니다. 음악의 수준을 좀더 높은 수준으로 향상시키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날의 음악의 현황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까요? 어느덧 하나님을 연상시키기 보다 헐리우드를 연상시키는 음악들과 연출법들이 도입되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멋진 남녀를 등장시키는가 하면 마음 깊이 와 닿는 진실성을 지녔던 소박한 복음송은 사라지고 전자악기를 사용한 현란한 연주로 값싼 눈물을 짜내는 감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잘못된 연주들이 우리의 혐오감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단지 대중들이 좋아하고 쉽게 반응한다는 이유 만으로 보잘것없고 저속한 예술적 관행들을 계속 답습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사실 모든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 목사야말로 결코 음악적으로 무지해서는 안 될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마틴 루터는 ‘음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가운에 신학 다음으로 귀한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수업 외 활동/세속적인 학교에서는 높은 인기를 끌고 있지만 기독교교육에서는 결코 받아 들일 수 없는 활동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애매한 문제들을 판별해야 하거나 모든 경우에 항상 기준으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원리들을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기계적으로 항상 동일한 결론을 내리는 것만이 기독교적 양심이 양심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동이 항상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이 되게끔 인도하고 이끄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양심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적절하게 잘 이루어진 일이라면, 어떤 노력이든지 비 이기적인 종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어떤 활동이든지 이웃을 섬기는 일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잘 짜여진 철학과목이나 성경과목이 하나님의 진리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리의 한 부분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기독교적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떠한 일인가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라는 점에 의해서도 좌우됩니다. 방법적 원리는 대부분의 현대교육철학들이 토대로 삼고 있는 실용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실용주의는 하나님을 상실한 자아의 적나라한 표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한다면 방법에 대하여 기독교적 장인기질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의 핵심이 이 원리입니다.

오늘날처럼 너나 할 것 없이 승부시합에 너무 지나칠 정도의 비중을 두는 상황은 균형과 조화의 상실의 문제를 초래합니다. 축구나 농구 등 승부시합에 쏠려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기독교적 운동정신’을 소리높이 외치고 시합 전에 기도를 드린다 할지라도 이미 균형과 통합이 깨지고 손상된 시합 자체의 상태를 돌이켜 놓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학교는 운동경기의 열기에 무분별하게 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기독교교육의 사명/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을 지니려면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 세계관을 떠받쳐줄 튼튼한 토대들을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쌓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대중(학부모)들은 높은 학년에 가서야(사춘기가 되어서야) 기독교교육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 교육에 대한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전략의 필요성은 깨닫지 못하고 기독교 교육이 참으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느냐?라는 문제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기독교적 활동에 더 큰 관심을 가집니다. 기독교학교가 해야 할 주된 의무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참다운 학문을 육성하고 그런 사람을 양성하는 일입니다. 기독교교육은 청소년들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함으로써 전 생애에 걸쳐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입니다.

기독교교육에서 탁월성의 정신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기독교교육에서 탁월성을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교육에 이지적인 차갑고도 냉정한 요소를 끌어들여서 성령의 뜨거움을 미지근한 것으로 식혀 버리는 위험한 처사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비록 정식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이 되었던 무디나 스펄전은 자기들 스스로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였지만 교육의 참다운 가치와 중요성을 간파하고 학교를 직접 세웠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주로 당대 최고의 지성을 지닌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져 왔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독교교육의 참된 의미는 기독교인들이 문학적 학문적 지도 및 선도의 능력을 함양시키고 신장시킴으로써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의 모든 문화와 학문의 영역들을 하나님 하시기에 아름답고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사가 지니는 예수그리스도의 표(자기 희생의 표)는 다른 직업보다 뚜렷합니다. 기독교교사는 자기 자신이 성취해내는 데서 보상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가 가르친 학생들이 교사 자신이 혼자서 했을 경우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많은 일들을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나가는 것을 볼 때에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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