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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현장이야기

지난 주일(19일) 심한 감기로 한 주일 가지 못하고 오늘로써 4주 동안의 쓰앙교회 리코더 교육을 마쳤습니다. 매 주일 오전 7시 반에 출발해서 2시쯤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1시간 일찍 6시 반에 출발을 했습니다. 첫 주일에는 초등학생 고학년을 가르쳤지만 대상을 바꾸어서 둘째 주일부터 남중학생 1명과 여중학생 2명과 주일학교 교사로 수고하는 자매와 교회 관리를 하는 청년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다 같이 진도를 나가려니 너무 더디어서 그 중에서 가장 빠른 남학생인 빠으에게만 집중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빠으는 궂은 일이나 심부름으로 선교사님을 잘 돕는 성실한 학생입니다. 그런데 오늘 빠으의 손과 발을 자세히 보면서 참 놀랐습니다. 캄보디아의 어린이들 거의가 맨발로 다니지만 빠으의 뒤꿈치에는 금이 가고 발이 얼마나 억세고 큰지 순간 놀랐습니다. 그리고 리코더를 가르치는 동안 손가락 모양이나 자세를 교정하면서 손을 만지는 순간 손가락이 딱딱한 나무막대기와 같았습니다. 이렇게 손과 발이 억세고 거칠고 딱딱할 수가 있을까? 그 거친 손으로 리코더의 구멍을 꼭 막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래서 그런지 구멍을 꼭 막지 못해 바람이 세어서 제 음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그것과 씨름하느라 또 얼마나 구멍을 꼭 막지 못한다고 지적을 했는지?
오늘은 빠으와 8시부터 한 시간 동안 연습을 한 후에 성인예배 시간에 ‘예수 사랑하심은’을 다 장조로 같이 연주를 했습니다. 연습할 때와 비슷하게 하기는 했지만 옆에서 빠으의 손을 보니 긴장해서 떨고 있었습니다. 빠으와 2중주를 한 후에 제가 섹스폰으로 ‘예수 사랑하심은’을 불렀습니다. 모두가 신기한 듯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4주 동안의 쓰앙교회 리코더 교육을 마쳤지만 아쉬움도 많고 앞으로 빠으가 계속 리코더를 불 수 있을지? 쉬운 노래들을 누가 어떻게 가르칠지? 모두가 미지수입니다. 단지 선교사님과 사모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속 가르쳐 주기를 기대합니다. 선교사님에게 노래도 제공해주고 형편이 허락하면 가끔씩 방문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배 후에 점심을 먹고 초등학교 2,4학년 여자 어린이 2명이 저에게 와서 리코더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얼굴과 눈을 보니 예사가 아닌 어린이임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빠으 오빠가 앞으로 너희 선생님이라고 말했습니다. 빠으 오빠에게 가르쳐 달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옆에서 밥을 먹고 있던 빠으가 듣고 환하게 웃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선교사님은 중학생 7명과 성경공부를 한 시간 가량 하였습니다. 그 중학생들이 쓰앙교회의 미래를 책임질 귀중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
학교에서 음악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캄보디아 어린이들을 가르쳐보니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서 찬송을 많이 불러 본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현지 사역자가 찬양을 많이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의 음계를 정확하게 부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몇 주 동안 반복해서 수십 번을 불렀지만 제대로 음정을 내지 못합니다. 리코더를 불면서 수도 없이 들었는데도 리코더 음을 따라서 내지 못합니다. 악보를 보는 법을 가르쳤지만 예를 들어 ‘솔’을 ‘솔’ 음정을 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여튼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중에 음감이 있어서 금방 따라 할 수 있고 음정이 정확한 어린이를 찾는 것이 관건인데 쉬운 과정이 아닙니다.
호산나학교에서는 매일 점심시간에 어린이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확인이 쉽지만 한 주일에 한번의 농촌 방문으로는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됩니다. 선교사님이 음악에 재능이 없으면 농촌 어린이들에게 제가 일 주일에 한번 방문해서 음악을 가르치는 일은 너무 무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청이 있으면 형편이 허락하는 한 한 시간 정도의 가까운 곳에는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주 언급하는 문제점입니다만 대부분의 선교사역이 선교사님이 직접 가르치고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 사역자들에게 맡기는 경우여서 음악교육이 없는 현지사역자가 어린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일은 너무나 요원한 일처럼 보입니다. 호산나 학교 어린이들 중에는 프놈펜에 있는 선교사님이 세운 교회에 출석하는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악기 교육은 그다지 없는 것 같습니다. 가끔은 교회에서 빌려왔다는 리코더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악기는 좀 있기는 한데 선교사님꾸준히 열심히 가르치고 있지는 않는 듯 합니다.
제가 선교지에 와서 느끼는 것 중에 가장 안타까운 것은 선교사님들이 직접 교회를 돌보거나 청소년들을 가르치지 않고 현지 사역자들에게 맡겨서 신앙의 질이나 내용이나 수준들이 너무 낮은 것입니다.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것들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는데, 그저 교회 많이 개척하고 사역자 많이 세우고 그래서 대단히 유명한 선교사요 엄청난 규모의 재정을 후원 받는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비록 더디더라도 소수에 집중하는 제자훈련을 소홀히 하고 금방 가시적인 효과가 나는 눈에 보이는 사역으로 한국교회의 후원을 독식 하는 귀족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속이 끓어 오릅니다. 선교지에서도 하향 평준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을 거쳐 훌륭한 지도자가 배출되는 교육선교에로 관심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캄보디아 곳곳에 신학교도 많습니다. 벌써 신학생 배출이 과다하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사명감으로 신학교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선교사의 권고에 의해서, 그리고 선교사가 모든 것을 지원해 주니 사명감 없이 신학교 나와서 교회를 맡아서 사역을 하니 어떻게 교회가 자립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선교사가 다 제공해 주는 교회, 그런 교회가 캄보디아에 가득합니다. 그리고 소수민족이 사는 곳에는 분명 한국 선교사가 건축했는데 선교사는 오지 않고 건물만 덩그러니 있는 경우도 확인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소수민족을 입양했노라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있겠지만 선교지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선교사의 문제겠지요.
리코더 하나로 호산나학교와 아가페고아원에서 가르치고 비록 4번에 걸쳐 쓰앙교회에 다녀왔습니다만 음악교육이 없는 캄보디아 땅에서 음악교육으로 어린이들의 심성과 영성과 그들의 미래까지 변화시키는 일에 소망을 품고 더욱 열심히 전진하리라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지난 번에 읽었던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와 ‘신본주의 교육’에서 음악에 관한 부문을 다시 읽어봅니다.

예술과 음악/예술적인 본능은 보편적 인간 현상이다. 국가 형태와 풍토와 나라들에 따라서 그 예술적인 본능의 발전 정도는 차이가 난다. 인간 삶 속의 모든 기능들이 인간의 보편적인 발전을 위하여 적당한 비율로 협력할 때에만 더 고상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모든 예술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 신적인 창출로 존중해야 한다. 음악은 마음을 감동시키고 마음의 성향과 도덕을 고상하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다. 음악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즐거움을 위하여 베풀어 주신 탁월한 은총이다.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상실된 아름다움의 산물이 어떠하였던가를 상기시키고 앞으로 올 완전한 아름다움의 영광을 예기하는 신비로운 사역을 갖고 있다. 가인의 후손에게 재능을 주신 것은 예술의 가인적인 성질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가장 높은 은사를 상실한 사람이라도 최소한 그보다 못한 예술의 은사를 통해서 신적 풍성함을 나타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술적인 아름다움은 우리 자신의 공상의 산물이나 주관적인 지각의 산물이 아니라 객관적인 존재로서의 신적 완전을 표현한 것이다. 예술적 본능은 천성적인 은사이며 죄에도 불구하고 일반은총이기 때문에 인간 본성에 있어서 계속 빛을 발하는 탁월한 은혜에 속한다.(아브라함 카이퍼의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 중에서)

음악과 기독교/음악은 아주 뛰어나 기독교 예술입니다. 음악은 영원한 나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입니다. 음악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를 잘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킴으로써 지금 이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음악이 종교상의 역할을 수행할 때에만 인간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음악작품들은 얼핏 보기에는 세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영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어거스틴은 ‘음악은 종교적인 신앙과도 유사하게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리의 영혼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생각을 아주 쉽게 불어넣어 주기 때문에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보에티우스는 ‘음악은 인간본성의 한 부분이며 우리의 인격을 향상시키기도 하고 타락시키기도 하는 힘을 지닌다’고 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은 인격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인격을 형성시키고 인격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음악의 현황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까요? 어느덧 하나님을 연상시키기 보다 헐리우드를 연상시키는 음악들과 연출법들이 도입되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멋진 남녀를 등장시키는가 하면 마음 깊이 와 닿는 진실성을 지녔던 소박한 복음송은 사라지고 전자악기를 사용한 현란한 연주로 값싼 눈물을 짜내는 감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잘못된 연주들이 우리의 혐오감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단지 대중들이 좋아하고 쉽게 반응한다는 이유 만으로 보잘것없고 저속한 예술적 관행들을 계속 답습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사실 모든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 목사야말로 결코 음악적으로 무지해서는 안 될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마틴 루터는 ‘음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가운에 신학 다음으로 귀한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프랭크 개블라인의 신본주의 교육 중에서)

(이것은 저의 생각입니다. 선교지에서 음악은 기타, 드럼, 키보드를 주로 사용합니다. 우선 쉽게 복음송을 가르치고 예배에 도움이 되고 음악적 효과를 내는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자기타와 드럼과 키보드로 연주되고 찬양하는 음악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그리고 리듬박스로 연주하는 찬양은 또 얼마나 이상하고 저급한지? 가르치기 힘든 피아노는 현지 청소년들에게 전혀 시도하지 않습니다. 모든 악기의 황제라고 불리는 피아노를 도외시한 교회음악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손쉬운 음악이 신앙마저도 손쉽게 급속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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