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범강의노래
[2011.11.6] 작은 신음에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 (123예친 박세영 성도)
작은 신음에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 (123예친 박세영 성도)
세 딸 중 둘째로 어릴 적 저희 집은 행복했습니다.
아버지는 택시운전을 하셨고 어머니께선 미용실을 운영하셔서 별 부족함 느끼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이단에 대한 정보가 지금같이 알려져 있지 않던 때 어머니께서 열성으로 다니시던 모교회에서 이단(엘리야복음선교회,한농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곤 제가 중1되던 해부터 그 이단을 좇아다니셨습니다.
가정은 그야말로 콩가루가 되었습니다. 저희 세 딸은 부모님의 잦은 별거와 가출, 부부싸움으로 하루도 웃으며 보내지 못하는 암흑 같은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물적, 심적으로 힘든 와중이었지만 저는 미술에 재능이 있어 미술대학에 진학했고 대학졸업 후 지긋지긋한 집을 나와 독립을 했습니다. 미술대학이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그림 그리며 성적도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던 저는 졸업하고 집을 나오면 예수님 없이도 혼자의 노력으로 뭔가를 이룰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어도 취직은 되지 않았고 차비도 없어 막막하던 때가 많았습니다. 방안에 누워 천장을 보고 울고, 밤에는 누가 쳐들어오지는 않을까 몸서리치며 지내기도 했습니다.
여기가 인생의 바닥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쯤 예전에 어머니의 강권으로 다니던 교회가 생각났습니다.
주일에는 부끄러워 차마 나가지 못하고 수요일예배에 저를 알아보실 집사님, 권사님들 눈을 피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두어번째쯤...목사님의 말씀이 꼭 제게 하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눈물, 콧물 쏟으며 예수님을 어렴풋이 만났습니다. 그 후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워주리라.’ 라는 말씀이 제 마음에 남아 교사에 대한 강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임용고시학원에 등록하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의 공부란 제가 경험해 보지 못한 치열한 전투 같았습니다.
정신적 고통이 극심해 교회예배시간마다 그렇게 눈물이 났습니다.
눈을 떠 아침이면 식사시간을 제외하곤 화장실가는 시간도 아까워할 만큼 책상에앉아 방대한 양을 암기해야했습니다.
임용준비생들에게 시간이란 그만큼 치열한 것이었지만 교회가는 시간은 꼭 떼어놓고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청년예배와 주일예배를 모두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꼭 교회맞은편 K중학교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전도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200명 정도의 작은 교회로 학교 교사가 한분도 계시지 않았기에 그런 사명감도 더했습니다.
임용고시 발표 전 다른 수험생이 어느 지역에 원서를 낼거냐고 물을때 저는 “대구”...라고 망설임없이 말했습니다.
그런 저의 말을 듣고 그분은 비웃었습니다.
대구는 미술정교사를 10여년간 뽑은적이 없었고 경북이나 경기도 등에 교사모집이 겨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임용고시 공고일 날 대구에 미술교사31명을 뽑는다는 공고가 나왔습니다. 이건 정말 희한한 숫자였습니다.
당시 국어교사를 25명 뽑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확실한 응답을 주신거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교사가 되고 정확하게 기도하던 K중학교로 발령받아 학생들 전도에 힘썼습니다.
물리적 상황이란게 사람에게 이렇게 치유도 되는 건지...그 뒤로 제 자아상도 많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결혼하고 내일교회로 온 후 좋은 순장님들을 만나 큰 교회에 적응을 잘하고 있습니다.
최경희권사님과 오은진 집사님의 사랑과 배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간증을 읽으시는 성도여러분 저희 어머니가 11월 27일 이단종교를 따라 브라질로 간다고 합니다.
엘리야복음선교회는 몇 년전부터 유기농업을 이단사업 전면에 내세워 사람들을 유혹하는 도구로 삼았고 이제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브라질에 유기농업을 한다고 합니다.
저희 어머니가 거기에 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로 가족에게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가족 : 박정석 성도, 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