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범강의노래
[2013.4.14]감사 또 감사 !!(814예친 이우열 집사)
[2013.4.14]감사 또 감사 !!(814예친 이우열 집사)
교회에 한 번만 더 가면 넌 이집 자식 아니다!
아버지의 불호령에 잔뜩 움츠러들어 있다가 토요일이면 도서관 간다하고 학생회모임으로 향하던 시절, 교회로 가는 발걸음은 날아갈듯 했습니다.
중학교 입학 하면서 친구와 같이 다니던 산동네 작은 교회, 그곳에서 처음 삶의 의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고 고등학생이 되어 주일학교 반사와 성가대 활동을 할 때 나에게도 작은 소명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요.
청년부활동을 하면서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지만 목사님의 말씀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가 무엇인지 찾게 해달라고 간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공고를 다녔기에 대학진학은 생각도 못하고 철도청 기능직에 합격된 날 , 어머니는 수화기 저편에서 장하다 우리아들 하시며 울먹이셨지요.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을 때면 작은 수첩에 짧은 기도의 글을 적으며 나의 장래를 그려보았고 주일이면 군인교회에 나가 성가대 봉사도 하면서 조금은 힘든 내무반 생활과 훈련을 잘 마칠 수 있었지요.
제대 후 제일 큰 기도의 제목은 앞으로의 내 일을 찾는 것 이었기에 지하 기도실에 들어가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찬송하고 기도하며 얻은 응답은 주일학생을 가르칠 때 성경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며 얻은 저의 작은 달란트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게도 작은 재능을 주셔서... 사실 군에 있을 때도 그림을 잘 그린다며 선임들의 추억록 그림을 천장 넘게 그려주었고 소대장님의 교안작성과 중대의 궤도 작업에 참여하면서 꾸준히 단련을 해온 샘이니 하나님의 섭리는 참 놀랍습니다.
낮엔 알바를 하고 저녁에 학원공부, 밤엔 집에서 정밀묘사 연습 ! 그게 입시 준비의 모두 였지만 산업디자인과에 합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이런 기쁨을 주시다니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학교생활은 저의 삶을 다시 한 번 열정으로 물들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시절 정명숙 집사를 청년부에서 만났습니다.
그녀는 인천서 서울까지 교회를 오가며 주일학교, 학생회,성가대 봉사를 마다하지 않았고 교회 활동을 하면서 지켜보는 나의 마음에 사랑으로 다가왔지요.
89년, 저희는 목사님의 지원과 배려로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지요. 믿음 없는 가정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결혼생활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일 년 후 고은이를 안고 교회근처로 이사하여 산동네지만 아름다운 우리의 보금자리를 만들던 날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92년 말 늦게 시작한 대학원 공부를 하며 공방을 오가는데 대구에서 전임을 뽑는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급히 서류와 자료들을 준비하고 면접을 보고 전임발령이 나기까지... 갑자기 부어주시는 은혜는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정집사와 저의 입에서는 감사의 찬양과 기도가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구요..
목사님께서도 기적이라고 말씀 하시며 함께 기뻐해 주셨지요.
대구로 이사 오고 사랑하는 웅기를 얻고부터 양가 어른들은 매우 기뻐하셨지요.
두집안 모두 믿음과는 거리가 멀기에 우린 더욱 잘되어야한다는 사명감이 컸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런 의미로 더욱 큰 감사의 조건을 허락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 어머님이 소천하시고 교회 식으로 장례를 치를 때 저와 식구들은 많이 울었습니다.
슬픔과 감사가 같이 담긴 눈물이었습니다. 교회를 반대하던 아버지의 마음에도 주님이 함께하시는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나 자녀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은 은혜를 받을 만한 그릇으로 우리를 만드시려 어렵고 힘든 시간을 주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핍박과 고난은 후일에 주어질 큰 영광이라는 믿음으로 지금의 우리가정의 모습에 감사하고 보시기에 미흡하지만 그래도 목사님과 전도사님, 주변의 이웃들을 통해 전해주시는 권면과 위로, 축복의 말씀들이 항상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봄을 열며 초록의 잎들이 참나무 숲을 물들입니다. 우리의 장래에도 저렇게 많은 감사 또 감사가 물결치기를 기도합니다 !!
<가족: 정명숙 집사, 고은, 웅기>
교회에 한 번만 더 가면 넌 이집 자식 아니다!
아버지의 불호령에 잔뜩 움츠러들어 있다가 토요일이면 도서관 간다하고 학생회모임으로 향하던 시절, 교회로 가는 발걸음은 날아갈듯 했습니다.
중학교 입학 하면서 친구와 같이 다니던 산동네 작은 교회, 그곳에서 처음 삶의 의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고 고등학생이 되어 주일학교 반사와 성가대 활동을 할 때 나에게도 작은 소명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요.
청년부활동을 하면서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지만 목사님의 말씀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가 무엇인지 찾게 해달라고 간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공고를 다녔기에 대학진학은 생각도 못하고 철도청 기능직에 합격된 날 , 어머니는 수화기 저편에서 장하다 우리아들 하시며 울먹이셨지요.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을 때면 작은 수첩에 짧은 기도의 글을 적으며 나의 장래를 그려보았고 주일이면 군인교회에 나가 성가대 봉사도 하면서 조금은 힘든 내무반 생활과 훈련을 잘 마칠 수 있었지요.
제대 후 제일 큰 기도의 제목은 앞으로의 내 일을 찾는 것 이었기에 지하 기도실에 들어가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찬송하고 기도하며 얻은 응답은 주일학생을 가르칠 때 성경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며 얻은 저의 작은 달란트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게도 작은 재능을 주셔서... 사실 군에 있을 때도 그림을 잘 그린다며 선임들의 추억록 그림을 천장 넘게 그려주었고 소대장님의 교안작성과 중대의 궤도 작업에 참여하면서 꾸준히 단련을 해온 샘이니 하나님의 섭리는 참 놀랍습니다.
낮엔 알바를 하고 저녁에 학원공부, 밤엔 집에서 정밀묘사 연습 ! 그게 입시 준비의 모두 였지만 산업디자인과에 합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이런 기쁨을 주시다니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학교생활은 저의 삶을 다시 한 번 열정으로 물들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시절 정명숙 집사를 청년부에서 만났습니다.
그녀는 인천서 서울까지 교회를 오가며 주일학교, 학생회,성가대 봉사를 마다하지 않았고 교회 활동을 하면서 지켜보는 나의 마음에 사랑으로 다가왔지요.
89년, 저희는 목사님의 지원과 배려로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지요. 믿음 없는 가정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결혼생활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일 년 후 고은이를 안고 교회근처로 이사하여 산동네지만 아름다운 우리의 보금자리를 만들던 날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92년 말 늦게 시작한 대학원 공부를 하며 공방을 오가는데 대구에서 전임을 뽑는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급히 서류와 자료들을 준비하고 면접을 보고 전임발령이 나기까지... 갑자기 부어주시는 은혜는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정집사와 저의 입에서는 감사의 찬양과 기도가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구요..
목사님께서도 기적이라고 말씀 하시며 함께 기뻐해 주셨지요.
대구로 이사 오고 사랑하는 웅기를 얻고부터 양가 어른들은 매우 기뻐하셨지요.
두집안 모두 믿음과는 거리가 멀기에 우린 더욱 잘되어야한다는 사명감이 컸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런 의미로 더욱 큰 감사의 조건을 허락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 어머님이 소천하시고 교회 식으로 장례를 치를 때 저와 식구들은 많이 울었습니다.
슬픔과 감사가 같이 담긴 눈물이었습니다. 교회를 반대하던 아버지의 마음에도 주님이 함께하시는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나 자녀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은 은혜를 받을 만한 그릇으로 우리를 만드시려 어렵고 힘든 시간을 주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핍박과 고난은 후일에 주어질 큰 영광이라는 믿음으로 지금의 우리가정의 모습에 감사하고 보시기에 미흡하지만 그래도 목사님과 전도사님, 주변의 이웃들을 통해 전해주시는 권면과 위로, 축복의 말씀들이 항상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봄을 열며 초록의 잎들이 참나무 숲을 물들입니다. 우리의 장래에도 저렇게 많은 감사 또 감사가 물결치기를 기도합니다 !!
<가족: 정명숙 집사, 고은, 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