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범강의노래
[2014.4.20]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32예친 박종인집사)
[2014.4.20]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32예친 박종인집사)
“집사님? 간증 좀 부탁 할께요“ 윤영미 전도사님이 밝은 얼굴로 말씀하십니다.
”저 그런 거 잘 못해요. 적을 말도 별로 없고...“ 그러나 머릿속은 벌써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있네요.
전 그 당시 시골을 떠나 대구에서 형과 함께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10월 어느 날 새벽, 꿈속에서 상여를 타고 웃으시며 멀리 떠나가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일어 났습니다.
꿈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날 아침 자취집 근처에 살고 계시는 친척 할머니를 통해 아버지께서 그 전날 공무 수행 중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희 가족은 한동안 실의와 절망에 빠졌고 특히 가족의 앞날을 홀로 짊어진 40대 초반의 어머니는 4남매를 양육해야 하는 경제적인 어려움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큰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주변에서는 집에 재수가 없으니 둘째 아들인 저를 다른 집에 팔아야 한다느니 굿을 크게 해서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느니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절망과 낙담 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어느 주일날 교회 종소리가 마음에 크게 와 닿은 어머니는 그 길로 교회에 나가셨습니다.
현명하신 어머니는 둘째 아들인 저를 다른 사람에게 파는 대신 만유의 왕이신 주님께 맡기며 큰 굿판 대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물리쳐야 더 이상 잡신들이 달려들지 않는다고 생각하셨답니다.
어머니는 꿈속에서 잡신들이 모두 쓸려 나가는 역사와 따스한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큰 위로를 경험했고 새벽기도와 말씀으로 믿음의 단을 쌓으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 오셨습니다.
이처럼 어머니의 신실한 믿음을 바라보며 성장해 온 저는 회사에서 수년째 신우회 임원을 맡고 있으며 이전에 섬겼던 김천영락교회에서도 주요 직분을 맡으며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지난해 저는 회사 지원 프로그램으로 가족과 함께 1년간 미국에 연수를 다녀 왔습니다.
한국 출국을 3일 앞두고 큰애가 기침할 때 피가 섞여 나온다길래 병원에 갔더니 폐렴은 아니지만 초음파 결과 간 모양이 비정상적이기 때문에 종양 가능성이 있어서 3개월 후에 정밀 진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앞이 캄캄했고 출국하는 인천공항에서까지 의사인 지인에게 X-ray 사진을 메일로 보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 합니다.
미국에 도착해서도 아내의 직장으로부터 1년간 휴직을 허가해 줄 수 없으니 복귀하라는 최종 통보를 받고 아내 없이 어떻게 대학교 학위를 하면서 동시에 애들을 돌보아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1년이 지나 연수를 잘 마치고 귀국한 지금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내대신 연로하신 어머님이 미국에 와서 애들을 돌보아 주셨는데 이로 말미암아 어머니는 15년간 미국에서 저희 집 근처에 살고 있는 당신의 큰아들을 맘껏 만나며 모자지간의 정을 나눌 수 있어서 “내 평생 이렇게 기쁜 시절은 없었다”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였으며 저 역시 10년 이상을 주말 부부로 살아오면서 아이들에게 많이 소홀 했었는데 몸으로 부대끼며 아낌없이 사랑을 줄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 했습니다.
저의 아내도 연수 기간 동안 한국에서 홀로 허전 했겠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다른 때 다른 모양으로 은혜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이들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건강하게 잘 적응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밖에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아시는 저만의 얘기가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도 그러시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믿음은 너무나 나약하고 굳어 있음을 고백합니다.
타인 앞에서는 겸손의 포장을 쓴 채 의인인양 했으나 실은 주님과 동행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밋밋하고 무료한 믿음 생활을 해 왔습니다.
감사한 일이 생겨도 뜨겁게 감사드리지 못하였고 온 맘으로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감정 없는 유전자가 저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언젠가는 나의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바꾸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대구로 이사를 와서 2011년 12월 내일 교회에 등록하게 되었는데 이관형 목사님은 자신의 삶을 반영시키며 성경적 기초 위에서 전파하시는 설교를 통해 성경속의 장면 장면이 눈앞에 쫙 펼쳐지기도 하며 주인공들의 심경과 믿음이 생생하게 느껴져 저는 거의 매번 눈시울을 적시며 설교에 큰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132 예친의 김규백 집사님을 비롯한 예친원들은 낯을 많이 가리는 저를 편안하게 대해 주시고 설교 말씀을 중심으로 서로의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교회에 빨리 정착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십니다.
큰 교회지만 여러 기관과 소모임에서 헌신하시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을 통해 아래부터 위까지 은혜가 넘침을 느끼며 내일교회에서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될 내일의 꿈을 키우며 믿음의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가족 : 김진양집사, 성민, 지은>
“집사님? 간증 좀 부탁 할께요“ 윤영미 전도사님이 밝은 얼굴로 말씀하십니다.
”저 그런 거 잘 못해요. 적을 말도 별로 없고...“ 그러나 머릿속은 벌써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있네요.
전 그 당시 시골을 떠나 대구에서 형과 함께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10월 어느 날 새벽, 꿈속에서 상여를 타고 웃으시며 멀리 떠나가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일어 났습니다.
꿈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날 아침 자취집 근처에 살고 계시는 친척 할머니를 통해 아버지께서 그 전날 공무 수행 중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희 가족은 한동안 실의와 절망에 빠졌고 특히 가족의 앞날을 홀로 짊어진 40대 초반의 어머니는 4남매를 양육해야 하는 경제적인 어려움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큰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주변에서는 집에 재수가 없으니 둘째 아들인 저를 다른 집에 팔아야 한다느니 굿을 크게 해서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느니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절망과 낙담 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어느 주일날 교회 종소리가 마음에 크게 와 닿은 어머니는 그 길로 교회에 나가셨습니다.
현명하신 어머니는 둘째 아들인 저를 다른 사람에게 파는 대신 만유의 왕이신 주님께 맡기며 큰 굿판 대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물리쳐야 더 이상 잡신들이 달려들지 않는다고 생각하셨답니다.
어머니는 꿈속에서 잡신들이 모두 쓸려 나가는 역사와 따스한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큰 위로를 경험했고 새벽기도와 말씀으로 믿음의 단을 쌓으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 오셨습니다.
이처럼 어머니의 신실한 믿음을 바라보며 성장해 온 저는 회사에서 수년째 신우회 임원을 맡고 있으며 이전에 섬겼던 김천영락교회에서도 주요 직분을 맡으며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지난해 저는 회사 지원 프로그램으로 가족과 함께 1년간 미국에 연수를 다녀 왔습니다.
한국 출국을 3일 앞두고 큰애가 기침할 때 피가 섞여 나온다길래 병원에 갔더니 폐렴은 아니지만 초음파 결과 간 모양이 비정상적이기 때문에 종양 가능성이 있어서 3개월 후에 정밀 진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앞이 캄캄했고 출국하는 인천공항에서까지 의사인 지인에게 X-ray 사진을 메일로 보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 합니다.
미국에 도착해서도 아내의 직장으로부터 1년간 휴직을 허가해 줄 수 없으니 복귀하라는 최종 통보를 받고 아내 없이 어떻게 대학교 학위를 하면서 동시에 애들을 돌보아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1년이 지나 연수를 잘 마치고 귀국한 지금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내대신 연로하신 어머님이 미국에 와서 애들을 돌보아 주셨는데 이로 말미암아 어머니는 15년간 미국에서 저희 집 근처에 살고 있는 당신의 큰아들을 맘껏 만나며 모자지간의 정을 나눌 수 있어서 “내 평생 이렇게 기쁜 시절은 없었다”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였으며 저 역시 10년 이상을 주말 부부로 살아오면서 아이들에게 많이 소홀 했었는데 몸으로 부대끼며 아낌없이 사랑을 줄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 했습니다.
저의 아내도 연수 기간 동안 한국에서 홀로 허전 했겠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다른 때 다른 모양으로 은혜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이들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건강하게 잘 적응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밖에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아시는 저만의 얘기가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도 그러시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믿음은 너무나 나약하고 굳어 있음을 고백합니다.
타인 앞에서는 겸손의 포장을 쓴 채 의인인양 했으나 실은 주님과 동행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밋밋하고 무료한 믿음 생활을 해 왔습니다.
감사한 일이 생겨도 뜨겁게 감사드리지 못하였고 온 맘으로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감정 없는 유전자가 저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언젠가는 나의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바꾸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대구로 이사를 와서 2011년 12월 내일 교회에 등록하게 되었는데 이관형 목사님은 자신의 삶을 반영시키며 성경적 기초 위에서 전파하시는 설교를 통해 성경속의 장면 장면이 눈앞에 쫙 펼쳐지기도 하며 주인공들의 심경과 믿음이 생생하게 느껴져 저는 거의 매번 눈시울을 적시며 설교에 큰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132 예친의 김규백 집사님을 비롯한 예친원들은 낯을 많이 가리는 저를 편안하게 대해 주시고 설교 말씀을 중심으로 서로의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교회에 빨리 정착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십니다.
큰 교회지만 여러 기관과 소모임에서 헌신하시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을 통해 아래부터 위까지 은혜가 넘침을 느끼며 내일교회에서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될 내일의 꿈을 키우며 믿음의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가족 : 김진양집사, 성민, 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