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선교현장이야기

[물에 대한 단상]


최승암 (풀잎) 선교사 (내일교회 파송, GMS 소속)


수 년 전에 조성모라는 가수는 '가시나무'라는 노래를 통해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럴드 J 크리스먼과 할 스트라우스는 위의 노래와 비슷한 제목의 책에서 '난 너를 미워해, 하지만 내 곁에 있어 줘(I hate you, Don't leave me)'라는 말로 내 속의 나를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네 인생길, 나 하나 잘 건사하기 쉽지 않지요. 내 속의 웅크리며 똬리를 틀고 있는 또 하나의 나를 다독이며 싸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성공적인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주위에 공동체의 모습으로 함께 살아가는 분들을 보면 정말 존경의 고개가 숙여집니다.

 

공동체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묵상 없이 어떻게 하다 보니 선교지에서 여러 가정이 함께하는 팀 사역의 모습으로 20 년 이상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나 혼자도 쉽지 않는 삶의 격랑인데, 개성이 강한 20 여 명의 선교사들과 어울려 타문화권에서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한때 단기 선교사들이 넘쳐날 때는 전체 식구들이 40여 명에 이르기도 했었는데, 수련회나 회식을 위해 이동할 때는 3.5톤 트럭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교단도, 파송 교회도, 소속 단체도 다른 선교사들이 하나의 사역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공동의 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어서 지금도 그 치열했던 시절로 돌아가겠느냐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함을 도모했던 시절은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선교를 이루어 나가는 수 많은 영역들, 이를테면 사역, 영성, 생활, 가정, 자녀 교육, 후임자 양성, 사역 인계 등과 더불어 동료 선교사들과의 교제와 함께함의 중요성은 결단코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 과정이 없었다면 자신의 깊은 한계를 발견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꽤 괜찮은 신앙인으로 착각하면서 자신을 속이며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 부대김의 파도를 타 보고서야 바울의 처절한 고백인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답니다. 동역자 때문에 침잠하고, 동역자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돌파할 용기를 얻으며 오랫동안 묵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에 대한 단상입니다.

 

요란한 불을 끄거나 이기는 것은 물입니다. 반대로 도도하게 흐르는 물을 불로 막지는 않지요. 노자의 철학을 한 마디로 물의 철학, '상선약수'(上善若水)로 부릅니다. ‘물은 만물에게 혜택을 주지만 다투는 일이 없어 가장 높은 선함을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물은 서둘러 가지도 않고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습니다. 항상 꾸준히 끝없이 흐를 뿐이지요. 흐르는 것이 물의 존재 양식입니다. 그러고 보니 인생도, 산천초목도, 온 우주만물도 흐르고 있네요.

 

물이 흐르다 보면 장애물을 만납니다. 그래도 물은 왜 앞길을 막느냐 다투지 않습니다. 자기 몸을 뒤집고, 휘어서 돌아갑니다. 가다가 웅덩이를 만나면 왜 패였느냐 탓하지 않고 자기 몸을 쓱 밀어 넣어 채우곤, 다시 흐릅니다. 그러다가 완전히 막힐 때가 있지요. 거대한 댐이나 계곡이 막고 설 때입니다. 이때 물은 안달하지 않고 가만히 쉽니다. 그저 때를 기다립니다. 언젠가 문이 열릴 때까지 불평이 없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기다리는 것을 잘 했었습니다. 수 십만의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홍해바다 앞에선 모세에게 하나님은 그저 '가만히 있어라' 명령했습니다. 시편에서도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노래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채운 뒤, 수문이 열리면 잠잠하던 물은 무섭게 떨어집니다. 이 때는 바위도, 흙도, 자갈도, 모래도, 나무도 쓸어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물의 유연성이 폭발적인 힘과 능력으로 변하는 순간이지요.

 

출신배경과 연령, 교단과 소속 교회가 서로 다른 선교사들을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기 위한 묘책으로 시도한 방법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성경공부, 기도회, 수련회, 선교사 자녀학교 운영, 타선교지 방문, 여행, 가정방문, 내적 치유 세미나, 고백하기, 편지쓰기, 유서쓰기, 선물하기, 생일잔치, 회식, 사역 및 재정 보고 공유, 기도편지 회람, MP(Mission Perspectives)... 셀 수도 없는 프로그램들은 각자의 기능과 역할을 통해 하나의 비전을 향해 나가는 걸음에 일정부분 기여했습니다.

 

그 중에 기억나는 하나가 있다면 '자연이름' 부르기입니다. 사람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대부분 부모가 택한 이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름은 자기를 부르는 호칭으로 대부분의 인생들은 이름의 자부심으로 살아가지만 한국 문화는 이름을 쉽게 부를 수 없는 제한이 많습니다. 이름의 자리엔 형, 언니, 선배님, 목사님, 선교사님, 사모님 등이 자리잡고 있지요. 이런 호칭들은 일견 정감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위계나 틀을 만들게 되고 그 결과 자연스런 교제와 소통에 장애를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각자 좋아하는 자연물 가운데 자기의 이미지와 맞는 것을 먼저 선택하고 동료들의 재가를 통해 인준하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재가의 과정은 본인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 뜬금없음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답니다. 옛날 선비들이 본명을 부르지 않고 호() 를 불렀던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지요.

 

자연이름에는 모닥불, 자갈 길, 청솔, 햇살, 바위, 안개, 푸른 산, 코스모스, 들국화, 들풀, 들녘 등이었는데, 그 가운데 '강물'이라는 이름도 있었습니다. 강물님은 이름 때문인지 몰라도 모나지 않고, 부딪치지 않고, 강처럼, 물처럼 유유자적 흘러가는 인생을 사십니다. 지금은 아프리카 선교지를 떠나 제3국에서 사역하는 강물님에게 언젠가아프리카가 좋으세요? 여기가 좋으세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강물님의 대답은 참으로 강물 다웠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가장 좋은 곳이라 믿고 삽니다." 강물처럼 여유있게, 강물처럼 쉬지 않고, 강물처럼 낮게, 강물처럼 채우며 흘러가는 인생의 지혜가 그리운 시절입니다.

 


제목 날짜
2022년 4월 김오현, 류승희 선교사 소식   2022.04.21
2022년 4월 김가중, 류정임 선교사 소식   2022.04.21
2022년 1월 김가중, 류정임 선교사 소식   2022.04.21
자연친화적 신앙   2019.08.10
공수훈련 보다는 덜 빤센 단기선교   2019.04.10
내게 강 같은 평화...   2019.04.05
"훈련은 전투다 각개전투!!"   2019.04.05
말라리아, 그리고 보신탕   2019.04.05
군함과 유람선   2019.04.05
조지아 아제르민족을 향한 21st Love Story   2017.11.26
조지아 아제르민족을 향한 20th Love Story   2017.07.16
주선양 류찬양선교사 기도편지(2017-6)   2017.07.02
주선양 류찬양선교사 기도편지(2017-5)   2017.05.28
주선양 류찬양선교사 기도편지(2017-4)   2017.04.15
조지아 아제르민족을 향한 19th Love Story   2017.02.26
안녕하세요?선교사님!   2016.12.08
주선양 류찬양선교사 기도편지(2016-11)   2016.11.20
조지아 아제르민족을 향한 18th Love Story   2016.10.16
딱지치기   2016.06.20
캄보디아에서 드리는 스무 번째 기도편지(2016. 6. 15)   2016.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