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내일사진


 


 


캔버스가 된 골목, '美路'가 된 '迷路' 웃음과 정이 넘치는 지역공동체


 


초겨울 바람이 꽤나 차가웠던 20일 오후 대구 달서구 두류 1`2동 11통. 골목 입구 2층 주택의 옥상에서 내려다본 동네는 지붕만 맞닿아 있었다. 다들 지은 지 수십 년은 됨직한 단층 주택들을 보면서 '이웃사촌'이란 단어의 의미가 저절로 떠올랐다.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길은 좁고 꼬불꼬불했다. 길 가운데에 서서 팔을 벌리면 골목 양쪽 집의 담벼락에 닿을 정도다. 하지만 '꽃길' 뒤에 이어지는 '동물원로', 다시 '화기애애로' 옆의 '희망로'를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훈훈해진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담벽 곳곳에 예쁜 벽화들이 장식돼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그림들 속에 담긴 주민들의 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구의 지역공동체 복원 현장들을 찾아봤다.


 



◆웃음과 정이 넘치는 파도고개 미로(美路) 마을


두류1`2동에는 8천400여 가구 1만8천4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 가운데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15%쯤 된다. 190여 가구 460여 명의 보금자리인 11통은 노인 비중이 조금 더 높아 20%에 육박한다. 박상호 두류1`2동장은 "140채 정도인 단독주택들의 '나이' 역시 많아 52%가 30년 이상 됐다"며 "1970, 80년대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그런 탓에 마을은 생동감이 부족했다. 자동차는커녕 오토바이가 겨우 다닐 만한 골목임에도 이웃 간 대화는 실종됐다. 생활환경은 세월이 흐를수록 낙후됐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바꿔보자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이곳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여름이다. 달서구청 주민생활지원과 이선미 행복나눔센터장이 발벗고 나서면서다. 사회복지사인 이 팀장은 "10여 년 전 이 동네 담당자로서 주민들과 나눴던 따스한 추억을 잊을 수 없었고, 잠재된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고 털어놓았다.


마을공동체 복원 작업은 벽화 그리기부터 시작됐다. 서울 경희대 학생들이 자원봉사 장소를 수소문한다는 이야기를 대구공동모금회로부터 전해 들은 이 팀장이 학생들을 마을로 안내했다. 이들은 보름 동안 마을 경로당에 머물면서 마을 구석구석을 꾸미기 시작했다. 미로(迷路) 마을이 '미로(美路) 마을'로 탈바꿈하는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마을 어르신들의 반응이 처음부터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추진돼왔던 재개발사업의 후유증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도대체 우리 동네에 왜 왔지?"라는 의문만 주민들의 마음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뙤약볕 아래에서 학생들이 땀 흘리며 봉사는 모습에 주민들을 서서히 바뀌었다. 신수연 11통장은 "막연한 궁금증이 '같이 한번 해보자'는 의욕으로 변화돼 타일 벽화작업에 재미있게 참여했다"며 "이후 마을 리더들이 수시로 모여서 마을 개선 아이디어를 논의했고 대구경북연구원에서 진행된 '도시학교'에도 다녔다"고 말했다.



전국에는 이곳보다 더 유명한 벽화마을이 많다. 일부는 골목마다 관광객들이 넘쳐날 정도다. 그러나 '미로 마을'은 외부 전문가들이 아니라 주민들과 인근 학교`종합복지관`대구시자원봉사센터`기업`종교단체가 직접 일구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사업 비용 5천400만원 역시 정부 예산이 아니라 전액 후원으로 이뤄졌다.


이 마을은 국토교통부가 지난 5월 개최한 도시재생대학 졸업 우수작품 발표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마을의 폐가를 리모델링해서 마을도서관, 갤러리 등 공동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느리기는 하지만 주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동네에 활기가 되살아나고 화합하는 모습이 참 뿌듯하다"고 귀띔했다.  


주민들이 추진해온 사업 내용도 이색적이다. 마을 주민이 직접 선물을 내놓은 파도고개 보물찾기 대회, 주민 작품으로 연 마을사진전, 복날 수박화채 파티가 열렸다. 문패 만들기, 골목 김장김치 담그기, 연탄 나누기도 조만간 진행된다. 20일 골목길에서 벽화 자원봉사 작업을 하고 있던 대학생 김진이`이소라 씨는 "아파트에서만 살았는데 인정이 넘치는 이런 동네라면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며 "하루종일 서서 일하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보람있다"고 말했다.


 


◆마을주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안심협동조합


양극화, 실업, 지나친 개인주의 등과 같은 사회문제는 세계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나라도 급속한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정신이 불가피하게 훼손되어온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를 보완해 나가기 위한 다양한 노력 가운데 하나가 지역 공동체 자립사업이다. 올해 안전행정부가 주관한 우수마을기업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대구 안심협동조합이 대표적 사례이다.



동구 안심1동에 있는 안심협동조합은 지난해 1월 지역 주민들의 출자로 구성됐다. 1계좌(2만5천원) 이상 참여한 조합원이 370명이 넘는다. 친환경 로컬푸드사업을 시작한 지난해 하반기에는 1억5천만원의 매출을 올렸으며 올해는 3억5천만원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유길의 조합 이사장은 "협동조합 아이디어의 시작은 2011년 9월 무렵 뜻있는 주민 7, 8명이 모여 토론을 하고 대학교수를 초청해 공부를 해나가면서 구체화됐다"며 "마을기업의 경영 성과보다 마을공동체 구성 활동이 더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안심협동조합은 다양한 공동체 사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문을 연 친환경 유기농매장 '땅이야기'에서는 대구지역 내 사회적기업과 자활단체, 친환경농산물 농가 등이 생산한 천연염색물, 친환경 세제, 김치, 두부, 콩나물 등을 판매하고 있다. 최근에는 안심체육공원 인근에 2호점을 열 정도로 반응도 좋아 우리밀을 이용한 친환경 빵을 직접 생산할 계획도 있다.


또 이곳은 주부`노인`장애인 등 마을 내 취약가구의 일터이기도 하다. 주민들의 경제활동을 통해 주민참여형 지역 일자리가 창출되는 지역 선순환 경제공동체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6명이 일하고 있지만 앞으로 30명까지 채용 규모를 늘린다는 게 목표다.


매장 운영수익은 마을에 재투자한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운영비와 인건비만 해결되면 수익은 마을에 재투자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지난해 10월 시작한 마을음악회는 매달 꼬박꼬박 열리고 있고 계절마다 마을축제, 도농교류 행사, 김장 담그기, 연탄 나누기 사업 등 지역과 조합원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대구 동구청 관계자는 "마을을 바꾸려는 참여 정신과 공동체 의식을 통해 도시형 마을기업의 새로운 성공 모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며 "동구 전체에 대한 파급 효과가 적지않다"고 소개했다.


 


◆중앙정부도 지원책 마련


중앙정부도 지역공동체 활성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지역공동체 문제를 지역과 주민의 영역으로 여기고 정부 차원의 지원과 관여를 자제했지만,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안전행정부에 따르면 정부는 전국에 산재한 지역공동체의 현황을 파악하고 이를 데이터베이스(DB)화할 방침이다. DB를 우선 구축하고 전반적인 실태가 파악되면 각 지역의 특성에 맞는 활성화 정책 개발이 가능하다. 안행부 관계자는 "이 같은 자료는 지자체 홈페이지에 게재해 활용할 수 있다"며 "지역공동체사업 추진 시 참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행부는 이와 함께 지역공동체 활성화를 지원할 법률을 제정하고 위원회와 기획단도 설치할 계획이다. 위원회는 국무총리 산하에, 기획단은 안행부에 각각 설치해 범정부적인 지원을 한다는 구상이다. 현재는 60여 개 지자체에서 관련 조례가 제정돼 주민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지만 상위 법률은 없다. 정부는 이 같은 관련 법률 제정으로 지자체별로 조세 감면이나 기금 조성 등 재정적 지원근거도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안행부는 또 이 같은 DB 구축과 전문인력 양성 등을 맡을 지원센터를 만들 방침이다. 안행부에는 중앙지원센터가, 지자체에는 지역지원센터가 설치되는 이원화 구조다. 중앙지원센터는 지역공동체진단지표를 개발하고 관련 조사나 연구를 수행할 수 있고 각 지자체의 지역지원센터는 시`군`구별로 활성화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안행부는 앞서 이달 14일 부산시청에서 전국 시`도 및 시`군`구의 지역공동체 담당 공무원, 학계 전문가 및 지역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지역공동체 활성화 우수사례 발표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서 부산 '산복마을 공동체'가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매일신문 공식트위터 @dgtwt / 온라인 기사 문의 maeil01@ms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