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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밤.


드디어 이스라엘에 도착했다.


렌트카를 빌려 진상형과 동훈이 운전한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놀라는 일은 지나치는 풍경의 표지판들이


성경에서 본 바로 그 지명들이라는 것이다.


벧호른.이라는 표지를 지난다.


이 곳은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격전지 중 하나인데.


 


예루살렘으로 다가갈수록 귀가 멍해 온다.


우기철인데가 해발 780m의 고지대라 그런지 안개가 자욱하다


먼 곳에 보이는 산등성이 위로 불빛들이 반짝인다.


저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이미 한국시간으로는 새벽이라 일어날 시간이지만


비행기에서 안 자고 버틴 덕분에 눈만 감으면 곧 잠이 들것 같다.


그러면 첫 날을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셈이다.


  



 


언젠가 실크로드를 횡단할 때 기차로 24시간을 넘게 내리 달렸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사막" 이라는 뜻을 가진 타클라마칸 사막 위.



누구도 멈추지 못할 것 같은 기차는 목적지에 다다르자 거짓말같이 정차했다.



마치 짧은 인생길의 한 토막과 같았다.



그 긴 여행길은 그 후로 내가 떠난 여행에게 인내를 가르쳤다.



이스라엘로의 긴 항로는 그에 비하면 짧은 편이었다.



내 인생의 지나온 길이 길고 길었다지만,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은 그보다 더할 것이다.




 


지나온 짧은 인생 속에도 가끔은 마음이 힘들 때가 있었다.



곧 눈을 뿌릴 하늘 처럼 그렇게 무겁게 짓누를 때가 있었다.



수많은 생각들 때문에 사고가 날 뻔 하기도, 익숙하게 가던 길인데도



정신을 차려보면 낯선 곳을 거닐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마음 한쪽으로는 기뻐해야지, 감사해야지. 라고 말하고 있지만



가끔 마음은 어려워 정처없이 헤매게 된다. 




 


마치 다윗의 심정도 이와 같을까? 



사울에게 쫓기다가, 자신을 숨겨준 제사장들까지도 다 죽임을 당하는 어두운 시대,


결국 택한 망명의 땅인 가드에서조차 그는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울고 있었다. 



 


"하나님,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종일 삼키려 하나이다." - 시56: 1-2 



 


그는 두려워 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 



원수들은 종일 다윗의 말을 곡해하기도 했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말을 비틀어 그를 비방하기도 했다. - 시56:5 



 


이런 다윗에 비할 수 없지만, 내 마음도 힘들어 그렇게 길을 걸을 때가 있다. 




언젠가 하나님이 나를 위로하셨던 것처럼



기쁨의 꽹가리를 울리며 나를 신이 나게 하시면 좋으련만



대부분의 시간은 마치 하나님의 부재와도 같은 시간. 



나는 혼자서 이 회색의 도시에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모두가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내 작은 신음은 거룩하지 못한 것인양 마치 믿음이 없는 것처럼 스러질 때가 있다. 




그렇지만 흥미롭게도 마음 한쪽 구석에서 나는 이 모든 슬픔 위에 서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이야기의 끝은 여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악다구니 문 입술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노래부르듯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시간아 흘러라. 하나님의 시간의 나날들아 흘러가라." 



 


인생을 포기해 버리는 이들은 당장의 실패가 마치 인생의 끝인것 처럼 여겨서다. 



자신의 슬픔은 누구도 위로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들은 보지 못할 뿐이다. 



그 슬픔.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무엇이 있다. 




다윗의 이 슬픔과 절망도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는 이 가드땅에서 블레셋 군대들 앞에서 침을 흘리고 미친적 하며 위기를 모면한다. 



얼마나 절망적이고 자존심상하며 수치스러운가? 



사람들은 이런 슬픔과 수치감 때문에 하나님을 부정하지만



다윗은 이 아픔속에 더욱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 절망이 그의 인생의 끝이 아니기에, 그의 원수는 결국 혈육을 가진 사람일 뿐이기에.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 시56:4 



 


다윗의 이 고백 뒤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가 한 번 고함이라도 치시는 날에


이 지구상의 누구라도 온전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이 계신다. 



그 하나님에게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 시56:8 



 


그는 내 눈물을 아시고, 그가 내 슬픔을 생각하신다. 




나의 슬픔은 어디서 기인하였나? 
나는 누구를 보고 있나? 
나의 슬픔의 대상이 사람인가? 



내가 상대해야 할 대상은 늘 하나님이라 말씀하신다. 



마치 당신을 대하는 것처럼 사람을 만나라 하신다. 



그렇다면 나는 밤이 맞도록 수고하여도 무익한 종이다. - 눅17:10 




언젠가 나는 하나님께 깊이를 구했다. 



내가 가진 깊이로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 응답이다." 



알 수 없는 깊이. 



사람들의 아픔, 하나님의 아픔을 지적인 동의로는 결코 알 지 못하는 깊이. 



체율하지 못하면 알 수 없고, 그 눈물을 알지 못하면 결코 알수 없는 깊이. 



다윗을 다윗 되게 한 그 깊이.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다윗은 어떻게 이런 고백들을 말할 수 있었을까?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까?


이번 이스라엘 여정에서 다윗을 만나고 싶다.


다윗을 다윗 되게 만드셨던 우리 주님을 만나고 싶다.


 


나는 성경의 인물 중 다윗을 좋아한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기름을 부을 사람을 찾았을때



다윗은 이름조차 없는 막내였고,


집안의 잔치에서도 초대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홀로 있는 시간,


그리고 기름부음을 받은 뒤
언제가 될 지 모를 성취의 시간까지,


환란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며 그의 마음을 조성했다.


그의 인생에서 흔한 기적 한 번 찾기 힘들지만, 그는 끊임없이 주님의 얼굴을 구했다.


왕으로써 모든 사람 위에 있을 때 조차도 나단의 지적앞에


자신의 가슴을 찢었던 사람이다.



 


그런 다윗을 보시며 결국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