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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채플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 분이 내게 다가왔다.
"요셉님, 맞으시죠?
드릴 게 있어서요."
"네?"

그 분이 내게 주신 것은 문화상품권 세 장이 들어 있는 봉투였다.
고마움을 표시하며 그 이유를 물었다.

얼마전부터 하나님이 내게 고마움을 표시하라는 마음을 주셨다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순종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것을 내게 어떻게 전달할까를 고민했단다. 메일을 보내기도 이상해 보이고.
그런데 아침에 하나님이 오늘부터 늘 가지고 다니라는 마음을 주셨단다.
가지고 온 날, 채플시간에 나를 만나게 되었고, 전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서로의 기도제목을 나누고, 헤어지며
나는 하나님께 물었다.
"어떤 의미일까요?
문화 상품권 세 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내게 전해준 선물을 나는 어떤 마음으로 받으면 될까요?


'여수룬'은 똑바르다, 올바르다. 라는 뜻에서 나온 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의로운 자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여수룬이라 부르셨다.
이스라엘이 여수룬으로 불린 이유는
그들이 선한 행동을 해서 불려진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여수룬은 기름져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해져서
하나님을 버리고 그 구원자를 업신여기게 될 것이다. (신32:15)


이것은 모세의 노래에 나오는 이야기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래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살아가게 될 것이지만, 이 노래를 기억하고 돌아오길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노래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숨기게 되면
마침내 그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두고 보겠다고 하신다. (신32:20)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그 분과 관계가 단절되면
그저 역동적인 삶을 살지 못하리라.
선교적인 삶은 살지 못한채,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인 막연한 우리의 바람일 뿐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이 땅에 수많은 신이 있고, 그 신들이 이 땅을 떠받치고 살며
하나님은 그저 자신의 종교를 확장하는 취향을 가지신 분으로 여긴다면
그저 우리의 관심을 받기 위한 질투의 화신일 뿐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이 땅의 주인이시다.
그는 나를 지으신 분이시며, 나의 주인이시며, 온 땅의 주인이시다.
내 몸은 내 것인데, 그 분께 내 사랑과 헌심을 나누어 드리는 개념이 아니다.
내가 인식을 하든, 하지 못하든 나는 원래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나는 나의 것이다! 라고 선언하며 하나님과의 분리를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엄밀히 말해 독립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주인을 섬긴다는 말이다.
하나님 아닌 다른 주인을 통칭하면 우상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들은 그저 돌이나 나무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은 바로 구원자를 업신여기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온갖 재앙으로 그들에게 퍼붓고
당신의 화살을 모조리 그들에게 쏘겠다고 말씀하신다. (신32:23)
하나님의 화살이 다 할 때까지 쏘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당신의 적대자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적대자가 되면 우리는 결코 살지 못한다.
하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하늘에서 화살을 쏜다고 생각해 보라.
하늘은 화살로 가득차 암흑이 될 것이다.
그 하늘이 땅에 박히면 살아서 서 있을 생명체도, 빈 자리도 없다.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을 때 이 땅의 모든 것은 심판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은
자신이 겪고 있는 저주와 슬픔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외면한 결과이다.
자신이 하나님을 외면했지만,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을 도우지 않았다고 원망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그 곳에는 수많은 전갈과 독사가 있었다. (신8:15)
하지만 그들중에 전갈이나 독사에 물린 자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광야에서 우리가 죽게 되었다'며
모세와 하나님께 원망했을 때
그들은 광야의 불뱀에 물려 진짜 죽게 되었다.
불뱀은 그들이 거닐던 곳에 늘 있어왔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 보호받고 있었음을 그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들이 죽을 것 같은 상황들은
실제로 죽게 만드는 요소들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들을 죽게 만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었으며
구원자와의 단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이 죽게 되었다. 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죽게 '내버려두셨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면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패역했으므로
하나님의 분노의 화살을 맞아 모두 사라졌다.
하나님의 백성이 다 흩어져서 아무도 그들을 기억할 수 없다." (신32:26)
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은 앞뒤흐름의 문맥에서 떼어낸 말씀을 붙드는 것이다. 그래선 안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벌하셨지만, 여전히 당신의 백성이시다.
이 모든 일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다시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원수를 포함한 모든 나라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외치신다.
"모든 나라들아, 주님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 하여라.
주님께서 그 종들의 피를 흘린 자에게 원수를 갚으시고
당신의 대적들에게 복수하신다.
당신의 땅과 백성이 지은 죄를 속하여 주신다."

우리는 절대로 원수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패배시켰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신32:27)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하는 장자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여수룬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부터 이어지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이
인간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폐하여 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영원히 잃지 않으신다.
역사의 주관자 이신 하나님의 언약은 그 분 스스로 성취하신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과 함께
주님의 공의로우신 심판과 회복의 구원사역에 대해
즐거워해야 한다. (신 32:43)


이스라엘은 알아야 한다.
어떻게 원수 한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 천 명을 물리치고,
둘이서 만 명을 도망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신32:30)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사사기의 지난 시간을 이렇게 말했다.
"백성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솔 군대의 사령관인 시스라와 블레셋 사람들과
모압 왕을 통해 그들을 치게 하셨다." (삼상 12:9)

유다왕 요아스 때에 아람 군대가 쳐들어왔다.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다.
왜냐하면 유다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이다. (대하 24:24)

원수까지도 아는 사실을 정작 본인은 알지 못하는 것에 하나님은 안타까워 하신다. (신32:31)

"자기들이 왜 패배를 당하였는지를 깨달을 지혜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의 종말이 어떻게 될지, 깨닫기만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신32:29)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물으신다.
"너희가 섬기던 그 신들이 어디에 있느냐?
그들이 일어나 너희를 돕게 하고, 너희의 피난처가 되게 하라." (신 32:39)

하지만 그것들은 침묵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물으신다.
지금은 그 신들을 과학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돈과 보험과 연금과 부동산을 이야기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마치 그것이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나님과 저울질 하는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이다.


보험과 주식은 위험부담이 있지만
부동산은 보다 더 안정적이지 않는가?
가까운 일본을 보라.
하나님의 숨소리에 그 또한 거품과도 같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우리가 섬기던 우상들은 내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함을 알게 될 것이다.
우상은 헛된 것이다.
오늘과 내일, 인생의 짧은 면만을 골라 보고 조급해 하는 게 인간이다.

하나님은 내게 물으신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살 수 있을것인가에 대해.

말했듯이 이 이야기는 모세의 노래속에 있는 내용들이다.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밟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 노래의 가사들을 실감하지도 못할 것이다.
어떻게 전쟁을 앞두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이
여전히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사는 이들이
배부를 것을 아직 경험하지도 못한 이들이
과연 자신들이 배불러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길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이 노래는 자신을 위한 노래이기도 하지만, 자식들을 위한 노래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루어질 사건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며
아프고 슬플 때에 이 노래를 기억하여 다시 하나님의 긍휼과 인애를 붙들 희망이기도 하다.


문화 상품권 세 장으로 나는 집을 살 수도 없고
떵떵거리며 자랑할 수도 없다.
기껏해야 책 세 권정도를 살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게 일용할 양식을 말씀하시는 거다.
오늘 누군가를 통해 일용할 양식을 주신 분이
내일도 나를 먹이실 것을 확신해야만 하는 것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나는 손에 잡히는 우상에게 무릎 꿇게 되는 것이다.

"오늘 나와 함께 살자,
오늘 나와 함께 걷자.


오늘처럼 내일을 걸으면 될거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아들아, 내게로 와.
나와의 시간은 인고의 시간이 아니란다.
즐겁고 기쁜 매일이 될거야.
사람들은 그런 너를 보고 혀를 차겠지만
그런 모습은 성경에서 수없이 찾을 수 있단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광경을 생각해 보렴.
나무를 자르고, 못을 치고, 옷깃으로 땀을 닦아내는 풍경도 생각해보렴.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바라보았겠니?

하지만 방주에 탄 자만이 나의 구원에 참여했단다.
그들은 울며 방주의 닫힌 문 앞에서 후회했을거야.

하지만 그 때도 나는 울고 있었단다.
나를 이해할 수 있겠니?
방주가 완성될 때까지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그들이 내게로 돌아오기를, 회개하기를 기다려 왔는지 아니?
심판의 때보다 기다림의 시간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길었단다.

너는 내 기쁨에 참여하렴.
많은 이의 마음을 두드리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렴.
아무도 내가 하는 일을 막지 못한단다. (신 32: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