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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다윗은 이 허기지고 물이 없고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한 가지를 구했다.
그것은 놀랍게도 바로 하나님의 인자다. (시63:3)
그는 자신의 왕좌를 다시 구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이 모든 처지, 어쩌면 그의 생명으로 대표될만한 어떤 것보다
주의 인자가 더 나으므로 주를 찬양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인가?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인자’라는 말의 원형은 원어로 ‘헤세드’ 이다.
이는 아무런 조건 없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끊임없는, 연속적인 그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
이 ‘헤세드’와 짝을 이루는 말이 바로 ‘에메트’라는 말인데
이는 진실이라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출 34:6)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시86:15)

이 ‘진실’이란 말로 번역된 ‘에메트’는 확고하다, 믿음직하다, 신뢰할 만하다,
기댈만 하다, 속이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다. 라는 뜻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황망한 피난길위의 광야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시63:3-4)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 받았을 그 짜릿한 순간에나
그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궁정에 머무른 영화로운 나날 뿐 아니라,
그가 오늘처럼 아들에게, 사랑하는 신하들에게 배신당했을 때조차
다윗은 그의 손을 들어 주를 송축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불거나 거친 길을 걷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신앙의 경중이 달리게 된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흔들림을 당해 보면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람의 진정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르바르’ 라고 한다.
미는 from 이란 뜻을 지녔고
말씀이라는 ‘다바르’ 에서 이 단어가 나왔다.
이는 광야가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전혀 볼 품 없어 보이는 이 곳을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모두 거쳐갔나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곳이기에
다윗은 아둘람의 좁은 굴안에서처럼
길 없어 보이는 이 곳을 두고 ‘주의 날개 그늘’이라 말하고 있나 보다..  (시63:7)



사람의 눈에 전혀 쓸모 없어 보이는, 버려진 이 곳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제련소일 줄 누가 알 수 있을까..

40년간 이 광야의 길을 걸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 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로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2-3)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에 보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풍경을 연상시킨다.
당신의 호흡으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듯, 우리를 살게 하시며
빛이 있으라 하신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만드셨다.
무엇보다 말씀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요1:1)

불확실성 속에 어디로 가얄지 모를 우리의 처지와 어둔 시절이
마치 광야와 같다면 우리를 궁극적으로 살게 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 분은 스스로를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는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키는 그 ‘에메트’이다.
오직 주님만이 믿음직하며, 신뢰할 만하고,
기댈만 하며, 속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분이시다.
그 분만이 우리를 이 광야같은 세상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길이 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고 하셨다. (마6:31)
이 부족한 땅에서도 사십 년 동안에 의복 하나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종일 걸어간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다. (신8:4)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2-33)



아.. 나는 이 말씀이 너무도 감사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하는 일이라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종일을 쏘다니는 것,
그렇게 쏘다니다가 길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
그게 전부였다.

남들 보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스스로 그 삶에 당당했다.
왜냐하면 그 일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일이라 믿었고,
그 길 위에 내가 서 있을 때 하나님은 내게 있어야 할 것들을
채우시는 분이시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신실하신 약속을 하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 내 아버지셨다.
나는 그 삶에 만족했고 감사했다.
그 후 8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사람들은 광야 같은 삶을 살았겠구나. 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그 기간동안 의복이 해어지거나 발이 부르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 8:4)
먹을 것에 모자람도 아무 부족함도 없었다 (신 8:9)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가 있었기에
도저히 광야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난 일정한 수입도 없었기에 결혼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그렇게 나를 먹이시고 기르시던 하나님은 그 두려움 마저도 덮으셨다.
내가 결혼을 하고, 이제 두 아이의 아빠가 될 때까지도 늘 신실하셨다.
아프리카에 우물을 만드는 과정속에 2억원의 빚을 지게 될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그렇게 내게 신실하셨다.
무엇이 중요한지, 인생과 삶과 영혼과 생명이 무엇인지를 하나씩 가르쳐 주셨다.

하지만 그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있다.
내가 처음 서울 땅을 밟으며 하나님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겠습니다.
내 삶을 인도해주세요' 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정말로 신실하게 내 삶을 이끌어 살아내고 계신데,
그에 반해 나는 과연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있는가?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나는 한없이 부끄럽다.
이런 부끄러움 앞에 하나님은 이렇게도 신실하신대 말이다..



광야 저 편에 무지개가 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의 표시다.
도망길에 있던 다윗도 저 무지개를 보았을까?

광야에 핀 무지개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나를 살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시6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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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멋있는 요셉이의 말과 신앙.....
    그리고 멋있는 사진과 하나님 말씀과 접목함이..
    하나님은 분명히 나의 아버지임을 확인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