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요셉이야기

 


 


유대광야.  
이스라엘을 향해오며 나는 아둘람굴만큼이나 이 곳을 고대했다.
3년전 이스라엘을 처음 밟았을 때
절대로 잊히지 않았던 기억이 바로 광야의 바람이었다.
그 때는 8월이라 정말 뜨거웠을 때다.
그나마 에어콘이 돌아가는 차안이라 숨 쉴만 했는데
차문을 열자 훅. 하고 불어오는 바람은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동물처럼 온 몸을 휘감으며
수분을 찾아내 핥아 댔다.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 (욘4:8)

요나가 죽기를  요청한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광야는 뜨거웠고, 특별했다.
요나가 죽기를 청했던 그 뜨거운 바람, 동풍은 성경의 곳곳에 나타난다.
서풍은 비를 몰고 오는 습한 바람이지만,
동풍은 광야의 뜨겁고 건조한 바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은 이 동풍을 불게 하셔서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출14:21)

밤새도록 큰 동풍을 부시는 하나님의 열심.

“결국 홍해를 가른 것은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여호와의 능력으로 '밤새워 분 동풍'의 힘이란다.
'밤새워 분 동풍'은 어둡고 절망적인 세상을 이길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열심이란다. ”
언젠가 우현 형이 동풍(East-wind)에 대해 목욕탕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목욕탕의 한증막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숨막히는 열기가 가득했던 광야를 직접 경험하고서야
그 뜨거운 하나님의 열심과, 예수님이 시험 받았던 풍경이며,
수많은 선배들이 보냈을 광야의 시절을 조금 그려낼 수 있었다.



그때의 열기에 비해 오늘은 제법 서늘한  광야에서 시편 63편을 묵상했다.
아마도 다윗이 왕으로 지내다 아들 압살롬에 쫓겨
광야로 도망할 때에 지은 시 같아 보인다.

그는 이 광야를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이라 말하고 있다. (시63:1)
마치 이 땅은 사랑하는 아들과, 평생 그와 동행했던 신하들의 배신으로
철저히 말라버린 다윗의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이 땅은 정말 마르고 황폐한 땅이다.
나는 꼭대기에 서서 길 없는 광야를 한참 내다 보았다.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광야에 바람만 분다.

이 곳과 비교할 때
내가 사는 시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비록 행복하진 않지만 불편하지 않다.
불편한 게 없기에 행복하다고 믿는 것이다.
19세기에 인류가 누린 삶의 질은 혁신적으로 진일보했고,
신학자들은 이대로, 조금만 더 인간이 노력하면 지상낙원이 온다고 기대했다.
석학들은 정말로 그렇게 믿었고 그들의 신학을 논리정연하게 만들어 갔다.
하지만 참혹한 1,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뒤에 더 이상 그렇게 주장하거나 믿는 사람은 없다.
인간이 살고 있는 시대는 결코 천국이 될 수 없다.

절망은 언제 시작되는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미래를 바라다 볼 때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는 하늘을 쳐다 볼 때
절망은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만나본 슬픈풍경들이 생각났다.
아프리카의 온갖 수인성 질병과 가난과 기근,
여러 내전과 식민지배의 흔적들..
독일의 참혹한 유대인 학살, 반목과 상처..
그 참혹한 모습들속에 성령님은 내 영혼을 통해 울고 있었다.

다들 조금만 자성하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격려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몫이기도 하지만
과연 조금씩 노력하면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그것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같은 세상을 살면서 왜 이렇게 불공평한 삶을 누려야 할까?
사실 세상은 절대로 공평하지가 않다.
그러면서 나는 하늘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본향을 바라는 순례자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는 이 땅을 위로하시길 원하시고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따라 이 땅에서 힘써 살아야 한다.
수고하고 위로하고 기도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따라 끌어 안아야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눈물이 씻기는 날은 오지 않았다.
지금 내가 맛 보는 것은 부분적일 뿐이다.



사람은 완전히 볼 수 없고 기도할 수 조차 없다.
사도바울조차 마땅히 기도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구약의 수많은 기도들을 꿰고 있는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나는 그 앞에 더더욱 머리를 조아릴 수 밖에 없다.
내 안에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고 계신다.
그것은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 진 것 처럼
이 땅 가운데 이루어 지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깨어진 이 땅, 오늘을 성령님의 부는 바람을 따라 살아 가지만,
난 궁극적인 승리의 날, 눈물도 아픔도 없는 그 날을 고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아직 철 없던 스무 살 나이 때부터
막연하게 기다리고 기도했던 허무함의 이유였나 보다..

-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