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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하나님, 이렇게 걷는 것인가요?
걷다 보면 많은 질문이 생긴다.
여러 바람을 만나게 된다.
내 마음은 그 바람을 맞아 이리 저리 쓸리게 된다.
묵묵한 내 표정과는 달리 내 마음은 비구름을 머금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생각하는 것이 다윗이다.
유리하는 이들과 함께 있던 다윗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 약속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차라리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았지만 여전히 양떼를 돌볼 때가 나았을지 모른다.
그 일은 하나의 이벤트로 끝나 버릴지도 모를테니까
양떼를 돌보던 이새의 막내 아들은
위대한 선지자를 통해 기름부음을 받았다.
당시 그도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이 정말로 그의 삶에 이루어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먼 훗날, 한 때의 추억으로 회상하는 게 더욱 마음 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 분이 행하신 일을 믿는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일하실 하나님을 기대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일상을 살았다.
하나님의 약속 성취가 언제가 될 지 모를 일이지만,
자신은 오늘의 맡겨진 삶을 살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울에게 쫓길 때의 다윗은 그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골리앗을 제압하고, 왕의 사위가 된 그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잡힐 듯, 성취될 듯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한순간에 다시 멀어져 버렸다.
마치 후. 하고 내쉬는 한숨처럼 모든 것은 사라져 버렸다.
그는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의 증오를 피해 숨어 지내야만 하는
죽은 개나 벼룩이 된 것이다. (삼상 24:14)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그저 평온한 일상을 살고 싶지는 않았을까?
일춘몽같은 짧은 영화 후에 그는 동굴에 숨어 지내는 인생이 된 것이다.


 



 


이 곳이 바로 다윗이 사울을 피해 지냈던 엔게디다.
뜨겁고 마른 땅만이 끝없이 이어진 광야에 핀 오아시스다.
이런 광야에 어떻게 냇물이 흐르고, 이런 촉촉한 식물들이 자랄까 신기했다.
엔게디는 암사슴의 샘이란 뜻으로 이름의 주인인
암사슴들이 무리지어 다녔다.
가파지른 절벽들을 가볍게 뛰어다니는 이들을 보며
성경에서 이 고백들이 어떤 그림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2:19)


 



 


사울이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쫓아 이 곳에 왔다.
죽음의 위험 앞에 다윗과 그의 무리들은 엔게디의 수많은 동굴 속으로 몸을 피했다.
공교롭게도 다윗이 숨은 곳으로 사울이 용변을 보러 들어왔다.
그의 뒤에서 다윗은 수만가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다윗의 부하 아비새의 말은 그의 깊은 속마음이었는지 모른다.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하나님이 붙이셨기에
창으로 그를 찔러 단번에 땅에 꽂게 하십시오
두 번 찌를 것도 없습니다." (삼상26:8)
그저 이 지긋지긋한 망명생활을 마칠 수 있다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거창한 무엇이 아니어도 좋았다.
아비새의 말처럼 하나님이 지금 다윗의 손에 칼자루를 맡겼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긴박한 사선에서
마치 현실을 살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이 사울에게 손대지 말것을 명했다.
사람이 보기에 자격미달인 왕처럼 보여도,
내 목숨을 노리는 원수지만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실 것이다."  (삼상 26:10)
그는 스스로 유리하는 길을 택했다.
왜냐하면 이 일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마치 아비새처럼 예수님을 붙들고 책망했다.(막8:32)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막 8:33)


 


도대체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기에
이런 좋은 기회를 놓쳐야만 하느냔 말이다.


 



 


우리의 대적자는 천상에서 우리를 이렇게 비방한다.
"당신이 기뻐하는 저 사람이
아무 대가없이 당신을 섬기겠습니까?
당신이 사람을 축복했기 때문에 그가 당신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경건하다고 말하는 저 사람은
자신의 유익으로 인해 당신을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욥 1:9-10)


 


사실 이 비방앞에 나는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이 생을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하나님께 살아갈 지혜와 힘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욥에 대한 보호를 걷어 가셨을 때
그는 숨쉬기도 힘들만큼,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만큼 나락으로 떨어졌다.
모든 가산은 탕진하였고, 자식들은 모두 죽음을 맞았다.
가장 가까운 몸인 아내는 그에게 독한 말을 던지고 떠나갔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시오" (욥 2:9)


 


친구들은 자신들의 지혜로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다 안다고 자신했다.
욥의 아내와 친구들과 모든 상황은
더이상 욥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상황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욥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바라봤다.


 


다윗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더이상 지속되지 못할 상황으로 치달아 갔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신뢰했다.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십니까?
그 때도 나와 함께 하셨습니까?
이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 하십니까?
 
수많은 질문들이 우리 삶 가운데 있지만
그 질문을 압축해 보면 내가 겪고 있는 이 일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인가?
과연 하나님의 간섭하심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이는 것만이 가득한 이 땅 가운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다윗은 혼자 울고 있다.
그가 찬양하는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다. (시109:1)
원수들은 그를 포위하여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며,
속이는 혀로 공격하고 있다.
 
흔히 우리가 상처를 입는 경우는
나와 관계있는 사람들에게서다.
우리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 우리에게 욕을 하고 손가락질 하면
우리는 쉽게 웃어 넘길 수 있지만
우리와 가까울 수록 우리는 더 큰 상처를 입는다.
다윗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가까운 사람이었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했다. " (시109:4)


 


사울은 그의 왕이었으며, 그의 사위였고
그가 가장 사랑했던 친구의 아비였다.
마치 슬픈 노래가사와 같은 비참한 현실이다.
나는 그들을 품으려고 애쓰지만
사랑하지만, 그들은 도리어 나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선대했지만 도리어 그들은 악으로 선을 갚았고,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다." (시109:5)


 


“오늘 하나님이 왕을 저 굴에서 제 손에 넘겨주신 것을 왕은 아셨을 것입니다.
제게 왕을 죽이라고 부추긴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왕을 아꼈습니다.
왕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분이기에
나는 왕에게 손을 대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왕은 내 생명을 해하려 하지만 나는 왕에게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삼상24:10-11)


 


다윗은 엔게디에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대적 사울을 살려줬지만
얼마후 십광야에 다윗이 머문다는 소식을 듣고
사울은 다시 군사 3000명을 모아 다윗을 죽이려 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다.
다윗은 그들을 향해 끝까지 선대하려 애썼지만
사울로 대표되는 대적자들은 다윗이 베푼 선을 도리어 악으로 갚고 있다.
이런 적반하장이 어디에 있는가?


 



 


다윗은 고통중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는 자신을 가난하고 빈곤하다고 표현한다. (시109:22)
마치 석양에 기우는 그림자처럼
잠시 후 넘어질 패망의 그림자처럼 그는 낙담하고 있다.
마치 농부에 의해 떨려지는 미물의 메뚜기같다.
그는 약하여져서 육체가 수착하였으며 오랜 금식으로 두 무릎은 약하여 졌다.
이 아픔과 고통의 시간은 도대체 언제 끝난단 말인가.
과연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인가?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가 하나님없이 무언가를 도모하게 만든다.
 
내게 힘을 실어주지 못하는 하나님보다
내 주먹을 믿거나, 그들의  적대에 똑같이 맞서리라 마음먹게 된다.
하지만 다윗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다윗은 이런 절망속에서 기도한다. (시109:4)
다윗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하나님께 찾고 있는 것이다.


 


욥은 성경속에, 인류속에 가장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욥과 그의 친구들의 논박은
바로 이 고통의 이유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친구들은 충분한 죄에 따른 응당한 처벌을 받고 있다고 욥을 정죄한다.
과연 이 저주의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지만
이들의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들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더이상 질문도 답도 필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침묵이 그 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의 모든 질문은 헛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지금 내 인생 가운데서도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의 모든 질문은 헛되게 된다.
하나님이 실제로 내 삶 가운데 드러나시면
내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고민과 질문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


 



 
다윗은 그의 시 마지막에 하나님께 찬양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찬양하기로 마음먹는다.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라" (시109:30)
 
그가 찬송하는 이유가
이 시의 마지막에 나온다.
접속사 '키'를 사용해서 그가 찬송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가 이 상황에서도 찬송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시109:31)
다윗은 하나님의 속성을 믿었다.
하나님의 성품을 믿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기대어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은 양육강식의 원리를 따르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고, 그것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럴 수 없을 때라도 하나님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서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위에 서있는 것이다.


 



 


길고도 긴 시간이 흘러
여호와께서 결국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다.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삼하 22:33-34)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며 (마27:46)
절규했지만 결국 절망속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
사람의 일은 절망속에 모든 것을 놓아 버리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일은 그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곳에서 당신의 구원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 조차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이란 열매를 빚어냈다. (히5:8)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합 2:3)

  • profile

    둘째 아이 예정일을 하루 앞두고 서둘러 글을 올립니다.
    '엔게디' 입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았지만 더디고 더딘 약속의 성취를
    다윗의 마음으로 담아 쓴 일기글입니다.

    이제 곧 태어날 아이와
    그 아이를 기르는 것 또한 더디고 인내가 필요할테지요.
    하지만 이 아이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때를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