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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매일 하나님과 대화하듯 일기를 씁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다가 작년에 쓴 일기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내일교회 중고등부 수련회를 인도한 후, 집으로 돌아와 쓴 글입니다. 


 


2010. 07. 23


수련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오후 강의를 마치고 짐을 싸 서울로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그 미묘한 간섭.


참 감사했고, 또 감사했다.


 




예정했던 강의를 마치고 짐을 싸고 있는데


갑자기 장로님들과의 저녁 약속을 잡게 되었다.


그로 인해 서울로의 출발을 2시간 정도 늦추게 되었다.


갑자기 비게 된 시간,


계속 맡아 왔던 상담을 한 두명 더 맡으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마지막 상담을 전도사님과 함께 하게 되었다.


사실, 상담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상담의 전부이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은 어떤 면에서


가장 실질적인 도움이 될것이다. 영적세계의 진동이 있을테니까..


 




전도사님과의 나눔, 그리고 그 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 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로 도왔다.


기도를 마치고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해 짐을 꾸리고, 차에 싣고 있는데


전도사님이 운동을 하는 몇 명의 학생들을 내게로 불러 모았다.


 




"이 아이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부탁드려요."


 



"이 아이들은 누군가요?"


 



"우리 고등부의 리더들인데


날마다 학교에서 전도해서 거의 60명 되는


새신자들 앞에서 매 주 설교도 하는 대단한 친구들입니다."


 




아. 어리기만 하다고 생각한 고등학생들이었는데


전도사님의 설명에 내 가슴이 저릿저릿 해왔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수, 하지만 깨어있는 그들에 의해 세워진다.


수많은 촬영과 기도를 통해 이미 보아왔다.


내가 며칠간의 수련회 동안 수고한 것도, 그 결실을 보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들에게 방언으로 기도하는지를 물었을 때 모두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이 시간들은 어쩌면 이들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머물던 방에서 작은 기도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전도사님은 서둘러 눈에 띄는 리더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그래서 10명 정도 되는 아이들과 더불어 방언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게 되었다.


너무나 헌신된 아이들이었지만 그들중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헌신되어 있기에, 그리고 어느 정도의 결실도 볼 수 있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에 대한 간절함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 한계와 차이를 말해줄 수 있을까?


 


내가 강아지를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과


내가 우리 딸 온유를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는 비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 차이를 메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필요없다고 여겼던 방언을 내가 처음 구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기도가 내 삶을 얼마나 역동적으로 바꾸어 놓았는지 모른다.


나보다 더 이른 나이에 헌신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깊고 뜨거운 기도를 마치고, 방에 모인 모두가 영으로 기도하게 되었고


나는 장로님과의 식사후 기분좋게 서울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전도사님께 전화가 왔다.


 


"아까, 방에서 함께 기도한 자매가


너무 기뻤던 나머지 친구들에게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친구들이 지금 울고 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다 말고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아내에게 전도사님과의 대화를 말해 주었다.


 




"아까 기도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고등학생들이


그동안 방언으로 기도하길 소원했는데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해서


많이 안타까웠나봐. 그래서 울고 있대."


 




"그러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것 아냐?


그 아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지."


 




그래서, 다시 전도사님께 전화해서 기도할 시간에 대해 여쭈었더니


다음 스케줄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밤 12시는 넘어야 기도모임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 가족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지금 기도하는 것은, 몇 시간을 내면 되는 문제이지만


밤 12시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았고, 기도모임을 끝내고


서울로 출발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될터였다.


우린 집을 떠나온 지 이미 열흘이나 지난터라 많이 피곤한 상태였다.


그리고 며칠뒤면 다시 인도로 촬영을 떠날 계획이라


그나마도 집에는 이틀정도밖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내와 나는, 암묵적인 동의를 가지고 차를 돌려 수련회장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았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잠들었다.


알람소리에 일어나 강당의 구석진 곳에 기도했다.


그 사이 밤 12시부터 기도모임이 있다는 광고.


하지만 내가 돌아왔다는 광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정말로 기도하고 싶은 사람들만 모으려는 계획이었다.


담당 전도사님은 리더들 15명 정도가 모일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한 명, 두 명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6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기도 인도는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평소에 기도하지 않은 사람을 안고 기도하는 만큼 힘든 일이 있을까?


방언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자신이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리를 내서 기도해야 하는데,


태어나서 처음 소리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정도였다.


나는 이미 목이 다 쉰 상태였는데


목이 쉰 내 목소리보다 더 작은 소리도 내기 힘든 아이들..


기도가 필요한 사람은 손을 들어 표시해 달라고 하면


손을 든 친구가 얼핏 보아도 반이상은 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쉼 없이 쫓아다니며 기도했다.


기도회는 늦은 새벽에야 끝이 났다.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눈을 감았다가


알람소리에 아침에 일어나 식당으로 내려갔다.


온유가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일찍 서울로 출발하려는 계획이었다.


식당으로 걸어가는데 남학생 한 명이 수줍게 내 곁에 와서는 허리 굽혀 인사했다.


 




"전도사님,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몰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에 대한 확신조차도 희미했지만


어제 기도하는 사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었고.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이런 한 명의 변화만으로도 내가 남은 의미가 되겠구나.


하나님의 나라는 크고 놀라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한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고 내가 늘 말해왔는데..


그러면서 내 안에 회개가 가득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내 발걸음을 하나님이 이끄시는데로 옮기겠습니다.


라고 자주 고백하지만,


내가 걸어갈 방향이 일단 정해지면


그것을 바꾸는 건 불편한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기쁘신 뜻을 내 삶에 개입해 주신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내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는 것만큼 고통스런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가 이미 결정해 놓은 발걸음이지만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그것을 옮기겠습니다.


그것이 회개라고 본다. 사랑이 동사라고 했던가? 회개도 동사다.


 




집으로 돌아왔더니


수련회 때 은혜 받은 친구들의 메일이 와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구원에 확신조차 없었던 친구들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던 친구들은


이번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어주신 은혜앞에


너무 벅차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은혜에 대해 감격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은혜를 부어주신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가 당연하다고 여기지는 않은가?


마치, 내가 받을 만해서 그 은혜를 누린다고생각하지 않은가?


혹, 내가 예상했던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낙심하거나 불평하지는 않은가?


사실, 나는 은혜 받을 자격 없는 존재였는데,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아무리 작은 은혜도


내가 가진 잔에는 넘칩니다.


하나님이 내게 베푸시는 아무리 작은 간섭하심도


내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