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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 2
나는 예수님을 믿는 가문에서 4대째로 태어났다.
신앙의 연수가 긴 편이다.
이보다 많은 가문도 6, 7대 정도일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예수님을 믿은 신앙의 연수는 고작해야 이 만큼이다.
그보다 긴 시간동안 우린 우상을 섬기고,
돌과 나무에게 절하던 민족이었다.
영영히 흑암의 지배 아래 있을 것 같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 소금을 던지셨다.
그리고 우리는 살게 되었다.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절망과 사망으로 가득한 물 근원에 소금을 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성경은 '물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다.' 고 말하고 있다. (왕상 2:22)
그 오늘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엘리사의 샘은
1급수에만 살 수 있는 다슬기과가 샘에 가득 할 정도로 맑고 청명했다.

저주받은 이 세상
흑암의 지배 아래 있던 이 땅에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를
언약궤 위 그 시은좌에 뿌리심으로 말미암아
저주와 사망은 끊어졌다.
그것은 개인의 인생 뿐 아니라 이 곳 이스라엘에도 마찬가지다.

긴 세월동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에는 희망이 없다고 말해왔다.
거의 이 천년동안이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고 핍박 당해 왔다.
십자군 전쟁 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의 이름과 십자가의 깃발’아래서
유대인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서는 회당안에 불을 질러
유대인들을 산 채로 불에 타 죽게 하며 찬양했다.



하지만 성경은 누가 예수님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는가?
과연 누가 예수님을 죽였는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사53:5)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죄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 때문에 죽으셨다.

종교개혁자 마틴루터 조차도 유대인들은 패역하다며 저주하고 돌아섰다.
카톨릭의 반유대적 법령과 루터의 글들은 나치시절 널리 인쇄되어
공식적으로 유대인들을 박해하게 만드는 근거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맹렬하게 저주할 자라 말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향해 내 백성이라 말씀하신다.

“나는 예루살렘과 시온을 몹시 사랑한다.
그러나 안일한 생활을 즐기는 이방 나라들에게는 크게 화가 난다.
나도 내 백성에게는 함부로 화를 내지 않는데,
이방 나라들은 내 백성을
내가 벌주는 것보다 더 심하게 괴롭힌다.“ (슥1:14-15 - 새번역)

고도의 문명을 산다고 자부하던 이십세기에 벌어진
이 끔찍한 박해는 유럽내 유대인 인구 900만명 중
자그마치 600만명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 대학살의 공포로 인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집과 재산을 버리고
자신들의 고토로 돌아가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심한 핍박으로 인해
십자가를 연상케 하는 덧셈(+)표시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히틀러조차도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이방인을 통해 유대인은 질투가 아니라(롬11:11) 그리스도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다.)



교회는 긴 시간동안 이스라엘을 고집스럽게 핍박해왔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멸망시켰을 때
동시에 주변의 모든 나라를 멸하셨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근동의 나라들 중 하나로써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에 의해 멸망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
바벨론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셨고,
그 주변의 국가들인 애굽과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에게 죄를 물으셨다.(렘46-49)
이들에게 물으신 죄의 많은 부분은
이스라엘의 고난을 조롱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적대시한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이름으로 지은 우리의 죄들 또한 물으실 것이다.

“내가 이 백성을 그들이 살아갈 땅에 심어서,
내가 그들에게 준 이 땅에서
다시는 뿌리가 뽑히지 않게 하겠다” (암9:15 - 새번역)
수 많은 위기와 불의와 아픔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지켜나가실 것이다.

“..내가 너를 흩었던 그 나라들은 다 멸할지라도
너는 사라지지 아니하리라..” (렘 46:28)

여리고 물이 소생되어 오늘에 이르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또한 여전하시다.


#3
하지만
이스라엘은 완고하여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무에 달린 메시아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사람을 극죄인으로 취급했다.
하나님이 그를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정하셨기 때문이다. (신21:23)

도대체 어떠한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기에 나무에 까지 달리게 되었을까?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중 하나가
어떻게 구세주로 오신 분이 나무에 달려 죽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
내가 당해야 할 저주와 모욕과 죄짊을 그 분이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나무에 달려 죽으셨다.
나무에 달린 죄인에 대한 성경본문의 주변을 살피면
죽은 자는 있지만 살해한 자를 찾을 수 없을 때 조차도
하나님은 죄값을 해결하시기를 원하셨다.
살해한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때조차도
그 피에 대해 누군가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검에서 가장 가까운 공동체에서 암송아지 희생제사를 드려
이 피값을 대신해야만 했다. (신 21:7)

그리고 이렇게 증언해야 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이 사람이 살해되는 현장을 목격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신21:7)

여기서 증언했다는 말은 원어로는 "대답하고 말했다"는 두 단어다.
이렇게 두 단어가 함께 나오는 경우는
두 사람이 대화하는 상황에서 한 사람이 묻고 다른 사람이 대답할 때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곳에는 재판장이 있고 검사가 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그 분이 없는 것 처럼 행동한다.
우리의 모든 삶의 정황속에는 우리의 재판장이 계신다.
검사는 우리를 날마다 송사하고,
재판장은 우리의 치른 죄값에 따라 의롭게 판결하신다.
그 판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죽은 송아지다.
죽은 송아지가 흘린 피에 대해 변호하는 것이다.



이렇게 제사하고, 주님께 죄 사함을 고하고 나면
그 피 흘린 죄에 대해 책임을 벗게 된다. (신21:8)
그들에게 지워진 살인의 책임을 벗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이다. (신21:9 -새번역)

죽은 사체와 죽은 송아지를 곁에 두고
산 사람들이 송아지의 피가 가득한 곳에 서있다.
이 절망적인 풍경은 누군가 피 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연출되었다.

살해자를 찾지 못한다고 해서
피 값의 원인도, 결과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공동체가 맡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궁극적인 죄값은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만 하는데
이 상황에서는 살해자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죽은 송아지는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시다.

이런 이해하지 못할 세상의 수많은 죄악들과 아픔까지 짊어지셔야 했다.
그것 만으로도 하나님은 온 우주 가운데 해야 할 모든 것을 하셨다.
하나님이 조금 힘있는 분 정도로 여기는가?
그 분이 어떤 분이신가?
우주의 주인이신 주님이 저주 아래 달리셨다.
나를 위해 죽으셨으며
이스라엘의 죄짐 까지도 짊어지셨다.



저주의 나무에 달리신 메시야.
유대인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진 박해.
여러 이유들로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아로써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그로 인해 땅 끝에 사는 내가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내가 그 수혜자가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속한 것이지
유대인들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는 말이 아니다.
지독할만큼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완전히 질려서 돌아섰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쓰러져
망하게끔 되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의 허물 때문에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 사람의 부요함이 되었다.
하물며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에는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기대할 수 있을까? (롬11:11-12 - 새번역)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나의 부요함이 되었고
이 나라와 열방의 부요함이 되었다.
하물며 이스라엘이 회복된 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심이 세상과의 화해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들을 받아들이심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나는 삶을
주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롬11:15 - 새번역)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초대교회 모든 믿는 이들의 소망이었으며,
우리가 예배때 마다 말하는 신앙고백(사도신경)이기도 하다.
죽은 자의 부활은 곧 주님의 재림과 때를 같이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
부활 과 승천하심 뿐 아니라
다시오심까지를 믿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스스로 지혜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롬 11:25)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그 분은 다시 오신다.
떠난 것처럼 다시 오실 분. (행 1:11)
이미 이루셨지만 그 완전한 성취.
그 언약의 성취를 소망하기에 지금 우린 이스라엘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