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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나는 좋은 노래와 연주를 듣게 되면 마냥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노래를 잘 부르거나, 악기를 다루는 것이 부럽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각자의 은사라고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볼 때면 부러웠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있는 생각을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내가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긴 시간에 걸쳐 내게 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젯밤에 누워 주님의 하신 일을 찬찬히 생각해보니
정말 예측할 수 없는 계획과 방법과 시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전공한, 잘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다고 얘기한 영역을 통해서,
적어도 한 번 이상 '나는 이 분야는 정말 할 수 없다.' 고 말한
그것을 통해 주님은 일하셨습니다.
나는 은혜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벌써 10년이 넘게 사진 찍었지만
오늘 사진 찍는 자체가 내겐 감사의 제목입니다.
이젠 익숙해져서 밥 먹는 것처럼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라 말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색약이라지만, 색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나 대로의 색 감각을 가지고 사진을 찍고,
내게 보이는 데로의 색으로 사진 찍고, 그림을 그릴 뿐,
이것을 장애라고 생각해본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나누어 말할 수 없습니다.

"왕이신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날마다 주를 찬양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시145:1-2)
다윗은 왕이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십니다.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다윗은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기억합니다.

자신의 왕이신 하나님을, 다윗은 몇 번에 걸쳐 찬양하는데
특이할 부분은 다윗은 하나님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하나님과 관련될 때의 이름은 그 분의 거룩한 성품이나 사역등을 반영합니다.
결국 이 말은 자신에게 이루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했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할 뿐 아니라,
자신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만났고 이를 찬양했던 것입니다.

나는 가끔 에덴동산이 그립습니다.
거울을 대면하는 듯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그 사귐,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그 사귐이 어떤지가 궁금합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 표현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에서는 창세기의 저자가 '여호와 하나님'이라 칭하는 반면에,
뱀과 여자와 남자는 '하나님'이라 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엘로힘'이라는 능력자, 심판자의 의미로 통칭적인 '신'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바알과 하나님 모두를 신으로 부를 수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능력자이면서도 우리와 친밀하게 관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 나와 관계 맺으시는 분을 뱀은 이간하여 갈라버렸습니다.
나와 하나님을 별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선악과를 먹게 되면 그 능력자와 같은 능력자가 될 것이라 속삭이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한 의존자가 아니라 자존자로 서는 순간,
우리는 변질 되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말을 하고 있지만,
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감격할 수 있다면,
자격 없는 내게 주신 아버지의 선물인 것을 잊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
찬양받기 합당하신 주님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왕이신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날마다 주를 찬양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시14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