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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에
내 안에 진정성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라고 한동안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에 대해 많은 부분을 수정해 주셨습니다.
내가 가진 생각속에 수많은 불순물과 기질과 자의식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편이었습니다.
숫기도 없었고, 말재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는 나는 내 진심을 이야기했다고 위안을 삼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내게  '겸손하지 못함'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늘 내 수준에 맞추어서 내가 이해할 수 있을만한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 수준이 아니라 당신의 수준에 맞추었다면
나는 그 언어의 아주 일부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수고를 따라 이해할 수 있을만한 언어로 말하고
그런 수준을 따라 글을 쓰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언젠가 촬영하고 있을 때 곁에 있던 친구가 말했습니다.
"와. 지금 좋다. 지금 사진 찍으면 좋을 것 같아."
사진을 찍으려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멈추었습니다.
이건 내 사진이다. 라는 자의식이 잔뜩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가라면 마땅히 자기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 밤에 주님은 나를 책망하셨습니다.
'네가 찍는 사진이 과연 너의 것이냐.'
그 전까지 수없이 많은 말로 고백했습니다.
'내 사진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라 고백했지만 실제로는 내 사진이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여진다면
친구의 말이 아니라, 간낫아이의 말이라도 겸손하게 듣고
그것에 순종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작가적 성향까지도 내려놓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결혼 후, 아내와 다툴 일은 거의 없었지만
신혼여행에서 아내가 나때문에 속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함께 사진을 찍다가 아내가 내게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는데
작가는 사진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당시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 때는 꽤 진지했습니다.
결혼하고 한 몸을 이루었다는 아내에게
내가 기존에 살아오던 방식을 요구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기준과 방식들은 주님 앞에서 이리 저리 흔들려야 했습니다.

바울서신에는 제사에 올려진 음식을 먹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과,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의 줄다리기가 있습니다.
바울은 지식이 있는 사람의 손을 들어주지만,
정작 자신은 믿음이 약한 누군가를 위해 평생 고기를 먹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8:9)

내 믿음은 누구의 것인가요?
내 기준은 누구의 것인가요?
내 자유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과연 내가 주님 앞에 온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이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6:9-10)

우리 안에 온전한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