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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그제, 동료들과 함께 급히 기도할 공간을 찾다가
그냥 공터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길지 않지만 강력하게 기도할 공간으로는 최적의 장소였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이 달콤하건, 아프거나 눈물로 가득하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감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주 예측 못할 장소에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차안에서 뿐 아니라, 심야의 패스트푸드점에서
비 내리는 카페에서, 인도의 공항 한 쪽 구석에서, 새벽의 차가운 거리에서..
기도하기에는 평범하지 않았던 장소였지만
그만큼 기도해야 할 절박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주님은 만나주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절박함을 관철시키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이 순간에도 여전한 아버지의 뜻이 있다는 보다 중요한 본질을 알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은 주님이 간과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무관심하시거나 무능력해보이기 까지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아는 수준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문제의 본질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을 수 없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 미디안의 7년간의 침략과 약탈로
굴과 웅덩이 속에 지내야 할 정도로 고통했습니다.
집을 두고 도망다녀야 할 정도로 미디안의 무차별적 학살은 잔혹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이스라엘의 범죄를 인지못하는 기드온의 오해로 생긴 질문이지만
기드온과 이스라엘이 인식하는 하나님을 그의 말속에서 알아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속의 한 때에 일하셨던 분이거나,
지금은 바알에게 무릎 꿇은 무능력하신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어느새 하나님을 제압한 바알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 보다 힘이 센 편에 붙는 것입니다.

지금의 풍경도 많이 달라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제압한 것들이 너무나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신처럼 의지합니다.
"바알로 하여금 스스로 변호하게 하라" (삿 6:32)
하지만 바알도, 신이 아닌 것들은 영원히 침묵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위엄으로 모든 적들을 무찌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부르시고 세우신 사람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 방식은 전혀 실용적이거나, 세련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용사를 끌어다 전쟁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기름부으시고, 그를 용사로 기르시고, 하나님께서 전쟁하십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양털로 확증을 구합니다.
'하나님, 이것을 제게 보이십시오.'
전쟁을 앞둔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그것을 보이십니다.
그것은 기드온에 대한 하나님의 적응입니다.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이미 다섯 번이나 확증해주셨지만
여전히 기드온의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약속과 팽팽한 긴장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용하시기 위해 오래 참으십니다.
하나님의 적응은 비단 기드온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해서도,
모세의 여정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두려움 가운데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실 때
기드온에게도, 모세에게도,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하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람은 그 약속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열 두 명중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악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민14:9)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가요?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에 대한 기대나 감사가 없는 이유는
그 분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