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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주일을 앞둔 밤, 기도중에 주님은 내 마음에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지금처럼 교회를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시대에 스스로 찾아온 영혼,
그에게 너는 이렇게 말하렴.
'많이 힘드시죠?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그 마음이 황폐했으면 그렇게 스스로 찾아왔겠느냐.
나는 그를 알고 사랑한단다."

당시, 나는 새가족반 리더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 주일이면 새신자를 맞게 되었는데
주일에 내가 만난 분은 건장한 체구를 한 30대 초반의 경상도 청년이었습니다.
자기 친구들은 대부분 교도소를 들락거렸고
자신은 다행스럽게 매 번 훈방조치에만 그쳤다며. 내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감동에 순종하기 위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이 힘드시죠?"
강해보이기만 했던 청년에게 이 말 한 마디가 그의 마음 어딘가에 꽂혔습니다.
"많이 힘드시죠?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세요."
이런 그에게 새신자 양육 교제를 펼수는 없어서
그저 하나님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말을 따라 그에게 전했습니다.

"혹시 용기가 있으신가요?
혹시 애정이 있으신가요?
우정은 어떤가요?
당신이 남들보다 더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정서가 있으신가요?
그것의 최대를 상상해 보세요.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의 최대를 한 번 상상해보세요.
당신에게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의 큰 그림을 그려보세요.
어디까지 미칠까요? 하늘 위 구름보다 더 큰 사랑을 상상해 보세요.
그 사랑의 원형은, 그 사랑의 전부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만일 당신에게 의분이 있나요? 불의함을 참지 못하는 정서가 있다면
그것이 공의라는 것입니다. 그것의 최대를 한 번 상상해보세요.
사람에게 가진 그것의 원형은 모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공의앞에 만일 죄가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공의는 죄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눈감아 줄 수 없습니다.
작고 검은 점 하나도 다 깨뜨려 져야 합니다.
그 완전한 공의 앞에 모든 죄는 정당한 심판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한 공의 뿐 아니라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너무나 사람을 사랑하셔서, 그 사랑을 어찌할 수 없는 분,
죽어야만 하는 한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그 긍휼, 그 사랑 또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완전한 공의와 그 완전한 사랑의 교차점에 바로 예수님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애굽의 왕자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과
탕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바보 같은 사랑을 말하며 나도 눈물 흘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당신은 구세주로, 주인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어깨를 들썩이며 그 덩치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두꺼운 손을 모아 기도했습니다.
그 날, 복음을 전하며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생각도 못했고, 준비하지 않은 메세지였지만
그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 측량못할 사랑에 말입니다.

구원자가 어떻게 저주 받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가 있는가.
구원자의 자격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십자가 앞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헬라인은 지혜를 찾았습니다.
믿는 고린도 교인들 조차 다른 지혜와 스승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 어리석어 보이는 진리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나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전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