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요셉이야기



내년 초 이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섬기고 있는 교회와 그리 멀지 않은 경기도 광주의 초입 부근입니다.
사진교실에 나오는 청년의 소개로 시간 날 때마다 몇 번씩 다녀가는 동안
내 마음에 떨림이 있을만큼 좋았지만
결정하고 보류하고 취소하기를 마음에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그 곳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비해 많이 저렴한 편이고,
주변에 편의점 하나 있을 뿐인 한적한 곳입니다.
하지만 꽤 넓은 공간과 주변의 숲, 부담스런 대출금 등 우리에게는 과분한 집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조건을 떠나
나의 번민은 이 선택을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실까. 하는 고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물론, 지금껏 하나님께서 객관식 답안처럼 내 길을 선택해주시진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처소를 주님께서 명확하게 인도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해주셨다면
그 집에 곰팡이가 피건, 물이 새건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언젠가 외국의 어딘가로, 나를 선교지로 보내실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가 주님의 계획과 상반된, 잘못된 선택을 하는건 아닐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있는데
내가 귀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 한 분에게서 메세지가 왔습니다.
작년에 만난 이 분은 외국인 근로자들의 자녀들을 데려다
자신의 집에서 길러내던 사역을 감당하시던 분입니다.
(이 분이 아니었으면 2교대로 근무하는 부모들 때문에 아이들이 늘 어두운 집에 방치되어야 합니다.)
너무 귀한 사역이란 생각에 여유가 될 때마다 조금씩 후원하긴 했지만
반 년이 넘도록 연락을 주고받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연락해 오신 그 분은 내게 혹시 집을 이사할 계획이 있으신지를 물으시며
얼마동안 하나님께서 이 분을 통해 나를 위한 기도를 시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마음에 품고 있는 모든 고민들을 그 분의 언어로 말씀해 주시며 확증해 주셨습니다.

말로, 글로 다 쓰지 못하는 어간의 고민과 아픔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런 기도제목을
주님은 또 다른 나의 몸을 통해 기도하게 하셨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조현삼 목사님의 책 <관계행복>을 보면
누군가를 도와야 할 가장 적절할 때는 그 사람의 필요의 때가 찼을 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일 주님이 내게 처음부터 구체적인 답들을 주셨다면 내 마음은 이렇게 기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고민하고 기도하며 주님을 찾고 또 찾았을 그 때,
주님의 적절한 때에 내게 말씀해 주셔서 내가 이렇게 기쁜 것입니다.
새로운 처소로 간다는 기쁨이 기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전히 내 아버지라는, 그 기쁨에 기쁜 것입니다.

나는 결혼 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나 혼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과연 가족을 이루고, 자녀들을 낳고 여전히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시기에 내가 그 길 위에 서 있을 때
당신께서 내게 있어야 할 것들을 채우시는 분이시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일 내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면 그 때도 만족하며 당당할 수 있을까?
그 방식을 함께 감당해야 한다면 그들도 나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
혹시 그럴 수 없을까봐,
나는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그 후 1년, 하나님은 내게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 삶이 힘들거나 지치지 않는 것은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기 때문이라고 그랬지?
그렇다면 네가 결혼했을 때
나는 네 개인의 아버지에게서 너의 가정의 아버지가 된단다."
이 간단한 진실 앞에 두려움이 떠나갔습니다.
주님이 내 가정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는 것,
그 믿음이 나를 얼마나 자유롭게 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주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그 믿음은,
내가 가정을 이루어도 동일한 고백이 되어 갑니다.

수없이 흔들리는 연약함이 감사합니다.
흔들릴 때마다, 연약할 때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 때마다 손 내미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저 관념적인 어떤 분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신 분.
침묵하셔도 침묵이 아닌 그 사랑앞에 노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