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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면
실상은 조금 불편할 뿐이지만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과 같다.
사람들은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다른 어떤 것들을 찾아 다닌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마13:44)
 
천국은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기뻐하며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나를 위한 투자일 수 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나를 위해 가장 좋은 결정은
주님의 계획 위에 내가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밭에 감추인 보화를 얻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파는 행위는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아서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는 것과 같다. (마13:45-46)
그 좋은 진주는 아무에게나 인정 받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진가를 아는 사람은 모든 소유를 팔아서라도
값을 치르고 얻는다.
그는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소유를 다 팔아도 절대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라는 것을.

허망한 것으로 빈자리를 채우기 싫어서 주께 무릎 꿇지만
기도 하고, 말씀 듣고, 은혜 받았지만
여전한 손에 잡히는 빈자리들이 있다.
하지만 한 번의 시도로 결코 충분하지 않다.
한 번으로 만족할 것도 아니지만
또한 한 번으로 실망할 것도 아니다.
시간이 필요하다.
날마다 구해야만 한다.
천국의 씨앗이 나무가 되는데 까지 시간이 필요하듯,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가 그것을 구하고,
얻기까지 흘릴 땀방울이 필요하듯,

천국은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아서
결국 그물이 가득 차면 좋은 것들은 담고,
나쁜 것들은 풀무불에 쳐 넣게 될 것이다. (마13:47-50)
 
마지막 때가 되어 갈수록
우리의 행동은 더욱 조심스러워 진다.
혹시나 내가 나쁜 물고기는 아닐까? 가라지는 아닐까?
물론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하지만
하지 않는 행동의 공로 때문에 지옥에 가지 않는 것 또한 아니다.
이 말은 안식일을 엄중하게 지키던 바리새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지 못한 것과도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목격하며
출애굽했지만 이내 광야에서 먹을 물이 없어서 모세에 대항하여 불평했다.
그들의 불평은 모세를 향한 것이었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목말라 죽게 하느냐" (출17:3)

하지만 이들이 범죄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들과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는 범죄가 
모세에게 불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출17:7)
 
쉽게 표현해서
그들이 불평한 것이 여호와께 범죄한 것이라면, 
불평하지 않았다면  범죄하지 않은 것일까?
불평하지 않아도 그들 중에 하나님이 계신것을 믿지 못했다면 같은 결과였을 것이다.
 
지옥은 두려운 것이지만,
지옥에 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붙드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반대로 우리는 천국에 가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가?
그 또한 예수님을 믿는 이유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우리가 천국에 가기위함이 목적이라면
우리는 누구이든, 무엇이든 천국에 갈 수 있는 티켓을 구하면 되는 것이다.
만약 천국에 예수님이 없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는 예수님이 없는 천국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 곳을 소망해야 하는가?
우리는 천국, 그 자체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랑되신 예수님을 소망해야 한다.
그것을 소망할 때 천국이 있고, 그 반대편 지옥이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라나타'로 인사했다고 한다.
마라나타 라는 말은 '주 예수여, 속히 오소서'라는 말이다.
우리는 왜 주님이 속히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주님이 올 때는 재앙과 심판이 뒤따른다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 답은 너무나 단순하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신랑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신랑인 것에 대해서
성경이 직접 말하는 것 외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스라엘의 결혼풍습에 대한 것이다.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당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가만히 끊고자 했다.
마리아가 간통한 혐의로 위험에 처한것에 대해 
요셉은 어떻게든 사정을 봐주려 한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정혼한 것은 한 집에서 살지 않는다 뿐이지
법적으로는 이미 부부로 보기 때문이다.
 
정혼하기 전, 그러니까 남자가 사모하는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하려면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잔치 비용을 타내서는
여자의 집에서 일주일 동안 성대한 잔치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잔치의 마지막 날 남자는 여자에게 포도주를 놓게 된다.
여자가 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면 남자의 잔치 배설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포도주를 마시면 이제 남자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 처소를 예비하게 된다.
그러면 신부는 처소를 예비하러 간 신랑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포도주, 곧 언약의 피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막14:24-25)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마심으로
주님과 정혼한 여인이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2-3)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잔치를 베푸시고
마지막 날 당신의 보혈로 언약을 맺으신 후,
처소를 예비하러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신랑되신 예수님은 당신의 신부들을 위해 다시 오시는 것이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 우리는 어린 양의 혼인잔칫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계19:9)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정혼녀로써, 사실상 신부로써
무엇을 가장 바라야 하는 것인가?
오실 신랑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신부에게 신랑은 모든 가치를 뛰어 넘는다.
나의 전부이다.
그렇다면 신랑이라는 보물이 밭에 감추어 있다면
신부는 마땅히 모든 소유를 팔아 기쁘게 그것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신랑이라는 극히 값진 진주를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