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요셉이야기

 







벧세메스와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아둘람(Adulam) 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차 안에서 표지를 보는 순간부터 내 마음은 마구 방망이질 쳤다.
이 곳은 내가 이스라엘을 오며 가장 기대했던 곳이다.
우현 형이 이 곳에서 다윗이 지은 시편을 물었을 때 바로 답을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성경지식에 해박해서가 아니라 이미 마음에 품고 있었던 말씀이기에 그랬다.

아둘람은 다윗이 사울왕의 살의를 피해 도망한 후에
곧바로 가드 왕 아기스에게 잡혔고
거기서도 침을 흘리며 미친 짓을 하고서 도망한 후에 도착한 곳이다.
이렇게 도망만 다니던 다윗에게 도망하는 무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성경은 그들을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삼상22:2)
이런 보잘것 없어 보이는 이들이 환난속에서 잘 훈련되어
결국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각각은 장관과 대신들이 된 것이다.
내가 쓴 이 짧은 글속에 얼마나 많은 눈물과 선택과 시간이 녹아있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 시작점이 바로 이 곳이다.



아둘람굴은 흔히 생각하듯 만장굴 같이 커다란 터널이 아니라
엎드려 포복해야지만 겨우 기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개미굴이었다.
덩치가 있거나 가방이라도 매면 절대로 지날 수 없는
좁고 긴 수많은 개미굴. 그런 수천개의 굴이 땅 속에 숨겨져 있었다.
폐쇄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못 지날 정도의 폭과 너비였다.
이런 굴 하나를 기어서 통과하는데 40여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린 긴장반 기대반을 가지고 손전등 불빛을 비추며
줄을 지어 동굴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하지만 예상보다도 더 느리게 진행되었다.
좁은 입구보다 뒤쪽은 더 좁아지거나 굴곡져서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에도 작은 회의장 같은 공간이 있어 숨 돌릴만 했는데
우리가 멈춰 쉬는 사이에 유대소년들이 줄을 지어 굴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로마군에 마지막으로 항거했던 마사다요새(Masada)에서
현재 이스라엘 군이 용사가 되길 소원하며 신병훈련을 갖는 것처럼,
다윗이 노래했던 이 좁은 아둘람에서 유대소년들은
작은 다윗이 되길 연습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들이 다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린 샛 길로 회귀했다.



‘오 주여 나의 마음이’,‘내가 만민 중에..’ , ‘내 영혼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사오니..’
이런 주옥같은 찬양이 바로 이 곳에서 지어진 시편 57편을 배경으로 한다.
동굴밖에서 우린 다윗이 아둘람에서 지은 시편으로 만든 이런 찬양들을 부르며 예배드렸다.
이번 여정은 찬양 사역자들 - 김명식, 김도현, 김종철 형들의 연주와 인도 때문에
찬양이 끊이질 않는다. 마치 뮤지컬영화속을 거닐고 있는 기분이다.
때마다 우현 형은 자연스럽게 말씀을 펴 나누고, 형들과 함께 찬양을 이어가는 것이다.
찬양을 하며 말씀을 나누며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충만함이 가득했다.

예배를 마치고 나는 다시 굴 속에 기어 들어갔다.
바닥을 기는 내 소리만이 굴 속에 가득했다.
어느 정도 들어가서는 굴에 드러누워 눈을 감고 다윗이 되어 보았다.
그는 어떻게 이 굴 속에서 이런 고백을 올려 드릴 수 있었을까?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드리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57:1)
이런 좁고 험한, 하나님의 부재(不在) 같은 공간을
그는 어떻게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합니다’ 라고 표현할 수 있었을까?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57:9)
어떻게 이 굴속에서 그는 온 열방을 대표해서 주님을 찬송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선택해야만 한다.
모든 것을 가진 것만 같았던 사울과
모든 것을 빼앗긴 것만 같았던 다윗.
하지만 그렇게 강인해 보이는 사울조차도
하나님의 부재 속에 엔돌의 점치는 여인을 찾아갔다.(삼상28:6-7)
민족의 큰 어른 사무엘은 죽었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미 가까이 이르렀고
하나님은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고 계신 것이다.
성경은 사울이 이 상황속에 두려워서 ‘크게’ 떨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 사울의 심정은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과도 같을 것이다.

하나님의 부재는 다윗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부재 속에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했다.

히브리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에게도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어 보인다.
그것은 순종이다.
이미 순종을 아시는 분이시지만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히5:8)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통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다면
우리는 당연히 고난을 통해 그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다윗을 다윗 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장래의 일을 미리 알게 되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오늘 하루를 겨우 들여다 볼 뿐이다.
사방이 막혀 있는 곳 속에서 오늘 내 발을 비추시는 주님께 묻는 것이다.(시119:105)
그 오늘이 내일이 되고, 우리가 궁금해 하는 미래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