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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어제 아내와 함께 금요예배를 다녀와서 잠시동안 '남극의 눈물'을 봤습니다.
오늘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뿐 아니라 피조물들도
인간의 타락 이후 저주를 받아 함께 탄식하고 있습니다.
지구 환경 파괴 정도에 따라 인류의 생존 위기감을 시간으로 표시한 것이
'환경위기시계'라는 것입니다.
2010년 9월 9일 기준으로 현재 시각은 9시 19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환경위기시계는 0~3시면 '불안하지 않음', 3~6시면 '조금 불안'
6~9시면 '꽤 불안', 9~12시면 '매우 불안'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 시간은 매 년 종전보다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피조물은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 때까지 탄식합니다.

또한 우리 영혼도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그 탄식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있지만
구원이 완성될 그 날을 고대하기에 탄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주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세상을 더 추구하게 됩니다.
성경에 바리새인과 함께 보게 되는 사두개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귀족으로 이루어져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이 말은 다른 역사서와 시가서, 선지서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스모니안 시대에 왕권에 붙어 성전을 둘러싼 모든 권리를 얻어 냈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맡는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큰 특권을 갖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강조하는 모세오경의 레위법적 정결성을 누구보다 강조했지만
다른 성경에 나오는 죽은 자의 부활, 천사, 마귀, 영적 세계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내 삶이 하나님의 나라 원리와 다르다면
내 삶을 바꾸어야 하겠지만
대부분은 하나님 나라의 법을 정교하게 바꾸어 버립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열심을 내어 버립니다.
그러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18세기 말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  토머스 맬서스라는 사람은
인구법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세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여 25년마다 배가 되지만
식량의 증가는 이 속도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보조나 지원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질병과 배고픔은 지구상의 인구를 줄여주는 자연적인 수단이라는 주장입니다.
그의 책이 출판되자 유럽의 지배층과 학자와 기업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멜서스의 이론은 사실 틀린 것입니다. 지구는 지금 인구의 두 배가 되어도 살 수 있지만
이 이론은 끔찍한 현실을 외면하고 무관심하게 만들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줍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지켜야 할 기득권이 있습니다.
사두개파에게도 부활도 천사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기득권이었습니다.
사무엘 상에 보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51:17)는 끔찍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말1:10)
그들에게 이런 말은 자신들의 존립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구의 또 다른 곳에서의 기근과 아픔에 대해 서양의 부자나라들은 '자연도태설'로
합리화 해버립니다.
하지만 지금은 서양의 부자나라들의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비록 편차는 있지만 이미 우리 나라는 세계부자 나라 서열 13위에 올라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각각의 지켜야 할 기득권이 있습니다.
정말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에게도 각자의 기득권이란 것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것은 있습니다.
내게도 그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 원리와 다르다면 나는 무엇을 바꾸어야 할까요?

오늘을 가리키는 환경위기시계처럼 주님 오실 날이 다가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도 살고, 보이지 않는 세상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때에는 양자택일 해야 할 시간을 만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을 희생해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난이라 부릅니다.
만일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란다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롬8:25)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롬8:18)


탄식하는 피조물, 탄식하는 우리 영혼처럼
우리 안에 탄식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온 만물의 생명이 되신 분이 내 안에 계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우리 아이들 온유와 소명은 나를 돕기 힘들지만
나는 그 아이들을 너끈하게 돕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두 자녀를 가진 저보다 약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당신은 그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밀고 당기는 사랑이 아닙니다. 당신이 가진 패를 다 보이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분의 상속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어떤 연약함도 그 분은 도우십니다.

아버지에게는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에서 놓임 받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에 그치는 것도 아닙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8:30)
그 분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영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그 아들 예수님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하십니다.(롬8:29)

그 모양을 빚어 가기 위해 보내야 할 현실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5:8-9)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갈 때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탄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탄식과 비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 분이 계십니다.
온 만물의 생명이 되신 분이 지금 내 안에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