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요셉이야기

 


 


“크신 주께 영광돌리세.
하나님의 성에서
그의 거룩한 산에서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상의 기쁨 ..
저 북방에 있는 시온산성 큰 왕의 성일세..”


 


터가 높고 아릅답다고 찬양하는 시온산성은
고지대에 위치해 있긴 하지만 사실 야트마한 언덕에 불과하다.
정말 터가 높고 아름다운 산을 말하려면
늘 만년설로 뒤덮혀 있는 헬몬산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시온산 남쪽 기슭에 있는 베드로 통곡교회 뒷 편)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산은 거룩한 땅인듯 하다.
왜냐하면 모리아산으로 부터의 언약을 따라
결국 거룩한 왕이 세워지는 곳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시2:6)


 


“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이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 (사18:7)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미 4:2)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생각사이에 이런 시차가 발생한다.
언덕에 불과한 시온산을 큰 왕의 성이라 말씀하시는 것처럼
주변국에 비해 보잘것 없어 보이는 이스라엘 땅을
하나님은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출 3:8)


 


이 말씀대로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데려갈 땅은 꿈의 동산 같아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비록 종살이로 고통했지만 애굽땅이 이스라엘 땅 보다는
아름답고 광대한 땅이 아니었을까?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갈데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롯의 소유가 많아지면서
속한 목자들끼리 다툼이 생겼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서로 다투지 말 것을 제안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 13:9)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좋은 땅을 선택할 수 있는 우선권을 내주었다.
롯은 자신의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다.
그 곳은 온 땅에 물이 넉넉했다.
당시에 물은 생명줄과 같기에
그가 바라본 땅은 이주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래서 롯이 보기에 그 땅은 하나님의 동산 같았고
애굽땅과도 같았다. (창 13:10)


 


롯은 제대로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그 땅이 얼마나 비옥했으면, 풍요로와 보였으면
애굽땅 같다고 표현할까? 하나님의 동산 같다고 말할까?
지금 말로 바꾸자면 강남의 노른자위를 취한 것이다.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을 비교한 말씀이 신명기에 나온다.
애굽 땅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가나안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다. (신11:10-11)


 


애굽은 주기적으로 나일강이 범람해서
그 주기를 따라 농사를 했고 해마다 풍년을 맞았다.
정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 강을 신의 축복이라 여겼다.
별 수고 없이 풍요로움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 땅이었다.
반면에 가나안 땅은 하늘의 비를 흡수하는 땅으로
모든 농사에 쓸 물을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해야만 하는 땅이었다.
당시 펌프 기술이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표면보다 낮은 물들은 아무 소용 없었기에
그들은 그저 하늘만 바라봐야 했다.


 


어느 것이 더 축복받은 땅인가?
물어볼 필요도 없을만큼 상식적인 질문이다.
실제로 고라 자손들은 모세를 거역하며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을 말했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민16:13) 


 


고라 자손들은 애굽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한다.
애굽은 그들이 보기에 너무나 풍요로운 땅이었다.
그 애굽땅과 비견되는 소돔과 고모라 땅도
고라 자손의 말을 빌리자면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이런 풍요로운 땅이 바로 여호와의 동산 같지 않겠는가?


 


반면에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가나안 땅은 
아름답고 광대하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말씀 하셨지만 
실제로는 실망 가득한 땅이었다.
더군다나 진입 장벽도 너무 높았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13:28-33)


 


어느 것 하나 쉬워 보이는 게 없는 땅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거짓말 하시는 분이신가?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이 모든 이야기의 결론을 알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잇점이라면
역사의 뒷 편에 살고 있어서
역사의 결말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롯이 살았던 소돔과 고모라는 당시 가장 부유했던 땅이었다.
롯은 이민자였지만 그 땅의 성 문에 앉을 정도로 유력자였다.
천사가 룻에게는 임박한 심판을 경고했지만 그는 지체하며 머뭇거렸다.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별하지 않으면 죽음이었다.
롯의 아내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남긴 것에 미련을 가져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한 아침을 맞았을 이 도시는
지금으로 말하면 바쁜 출근길, 상쾌한 음악에 브런치를 먹기도 하고
아침 뉴스나 신문을 읽으며 전날과 같은 하루를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심판의 날은 도둑 같이 임했다.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벧후 3:10)


 



 


소돔과 고모라는 처절하게 불로 심판 받았으며
애굽 땅에 임했던 열 가지 재앙은 
그들이 섬겼던 우상들의 진멸과도 같다.
풍료로움의 상징이었던 나일강이 피로 변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 풍요로움으로 인해 신으로 추앙받던 바로의 맏아들
곧 차기 바로왕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풍요로움이 하나님의 축복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성경은 우리 눈에 보이고, 우리 손에 잡히는 것만을
복있다. 풍요롭다. 형통하다 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다.


 


사람들은 안전한 것을 찾아 헤맨다.
더욱 안전한 보험과 보장자산과 부동산을 찾는다.
일본에서의 상상못할 일들을 만나고 난 후에는
부동산보다 안전한 금을 찾아 그 곳에 기댄다.
어딘가 마음을 두고 기댈만한 곳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안전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땅이다.
그런 의미에서 살 수 없는 땅 광야는 도리어 복 있는 땅이다.


 


지난 10년 간 하나님은 내 삶 가운데 신실하게 먹이시고 기르셨다.
'당신의 나라와 의를 구하겠습니다.' 라는 말을 내걸고 살았지만
온통 내 모습은 부끄러운 것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얼마나 신실하게 나를 지키셨는지 모른다.
'은혜로 살게 하셨습니다.' 라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다.


 



 


눈에 보이는 나의 상황이 절망 가운데,
낭떠러지 가운데 서 있더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그 때에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비천에 처할 때나 풍부에 처할 때나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의 위대함은, 비천에 처할 때 뿐 아니라
풍부에 처할 때 조차도 하나님을 바라는 데 있다.


 


사람들은 자존자로 서있길 원한다.
눈에 보이는, 손에 잡히는 안정된 곳에 서있길 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의존자가 되길 원하신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손에 잡히지 않지만
그 분이 가장 믿음직한 반석이라는 믿음으로
주님께 꼭 붙어있길 원하신다.


 


앞서 만난 롯이나 고라자손, 정탐꾼들보다 우리가 유리한 것은
그들보다 인내력이 더 있거나, 선한 성품 같은 것에서 찾을 바 아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만일 자신들이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않았으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했다’고 말씀하셨다. (마23:31)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나는 그들과 같지 않다. 라는 말은 우리를 전혀 변호해 주지 못한다.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나는 스스로 선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나를 건져내 주실 분은
다만 나의 길을 옳게 인도하실 분은 주님 뿐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만 한다.


 



 


“아, 하나님 우리를 정말로 내버리신 것입니까?
아,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않으리렵니까?” (시 108:11)


 


이 시편에서 보면 이스라엘군대는 전쟁중에 대적들에게 패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윗은 전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을 붙들었다.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시 108:4)


 


인자와 진실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와 에메트를 말한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끊이지 않는 사랑, 실패하지 않는,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며
에메트는 그 신실성, 정말로 기댈 수 있는 언덕을 뜻한다.


 


비록 오늘 우리 군대가 대적 앞에 패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은 온 우주 가운데 영원하시다.
주님의 한결 같은 그 사랑은 하늘보다 더 높고,
주님의 진실하심이 구름에까지 닿는다.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발을 벗어 던질지며
블레셋 앞에서 내가 외치리라 하셨도다” (시 108:8-9)


 


에브라임은 북쪽, 유다는 남쪽을 대표하며
길르앗과 므낫세는 동쪽, 에브라임과 유다는 서쪽을 대표한다.
이스라엘 모든 땅, 동서남북 모든 땅이 비록 전쟁 가운데 있지만
그리고 오늘 마치 패배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그 땅의 소유는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지금 대적이 차지하고 있는 땅도
사실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다.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신다.
내가 견고한 분과 함께 있다면
비록 내가 선 땅이 견고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흑암 가운데 빠져 있는 듯 보여도


 


애굽에 고통하던 이스라엘을 찾아와 말씀하신 것처럼
밤새 풍랑 속에 고난 당하고 있던 제자에게 찾아오신 것처럼
그 분은 내게 손내시며 말씀하신다.
“내니, 두려워 말라.”


 


예. 주님은 내게 가장 견고한 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