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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적당히 하라.'
말씀을 묵상하며 드는 생각 하나를 옮겨 적었다.
오늘 주님은 내게 원수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말씀하신다. (눅6:27)
내게 원수라고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서 피상적이지만
맹렬한 분노로 증오하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이 말씀을 묵상했다.
그가 내 이 빰을 치고, 또 다른 뺨을 돌려대며
내 겉옷과 속옷을 내어준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축복하고 기도까지 한다. (눅6:27-38)

며칠전, 예수님의 꿈을 꾸었다.
나는 꿈에 나온 그가 예수님인줄 알지 못했다.
꿈에 나온 모두는 그리스도인이었다.
모두들 적당히 살고 있었다.
좋은 말씀을 좋게 적용했고, 다루어야 할 말씀을 무리없이 적당하게 적용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말씀을 그대로 살아가는 그에게는 억지스러움이 없었다.
그는 말씀 그 자체와 같아 보였다.

호기심으로 그에게 다가갈수록 나는 많은 숙제들을 안게 되었다.
그 숙제들은 내게 크고 무거운 형태들이 아니었다.
다만 조금 귀찮고, 어리석어 보일뿐이었다.
효율성을 따져 묻는 보통사람은 쉽게 하지 않을 행동정도였다.
나는 순종하기 시작했고
순종은 또 다른 순종을 낳게 되었다.
나는 언젠든 그 순종을 그만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순종은 은혜를 알게 했으며,
은혜의 빛은, 그가 누구인지 자연스레 알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 생명의 강이 가득 흘렀다.
그가 바로 예수님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내 안에 가득하면
이 말씀들은 원수를 향해 기도해야 한다는 강제력이 아니라,
기도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은혜로써 작동하게 된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될 것이라 약속 하셨다. (눅6:35)
차라리 이런 약속이 아니라 10억을 준다고 하면 더 효과적일까?
물질만능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기쁨보다 10억이 더 가치있다고 여기진 않을까? 
장자의 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에서의 안목을 추구할까 두렵다.

말씀을 입맛대로 적당히 골라 순종하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는 이유는
내게 잃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 고백하지만
이미 내 손에 쥔 것은 모두 내 것이라 여긴다.
믿음의 모험, 그 항해에 있어서
밑바닥은 모든 것을 걸지만,
가진 것이 많은 이는 잃을 것이 많다고 여긴다.
겉옷을 가진자가 이 말씀 앞에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에게 이 말씀은 상대적으로 위협적이지 않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지만
그 은혜가 도리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다면 그것은 더이상 은혜가 아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해 실망하는 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어떤지를 망각한 때문이다.
사람은 희망할 수 없는 죄인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일하신다.
변해야 할 대상은 나이며
그를 변화시키는 것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
거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단번에 은혜 받는 일은 가능할 수 있지만
사람의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죽음을 고백할 사람은 오늘도 내가 되어야 한다.
내 은혜가 족한 것은 하나님이 내게 이루신 일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아닌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그 기쁨.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