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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비 내리는 날, 기드온의 양털시험을 생각했습니다.
선배가 이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말해야 할지 곤혹스럽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처럼 하나님께 양털이 마르기를,
또는 젖기를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입니다.
쉽게 풀리지 않을 질문을 마음에 담고 한참을 걸었습니다.
 
이미 염소새끼로 기적을 경험한 그는 미디안 연합과의 전쟁을 앞두고
또 한 번 양털을 가지고 하나님께 확증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자꾸만 하나님께 확증을 구하는 기드온과
그럼에도 아이를 대하듯 성실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먼저, 기드온의 상태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
미디안의 7년간의 침략과 약탈로 
굴과 웅덩이 속에 지내야 할 정도로 고통했습니다.
집을 두고 도망다녀야 할 정도로
미디안의 무차별적 학살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물론 이스라엘의 범죄를 인지못하는 기드온의 오해로 생긴 질문이지만
기드온과 이스라엘이 인식하는 하나님을 그의 말속에서 알아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속의 한 때에 일하셨던 분이거나,
지금은 바알에게 무릎 꿇은 무능력하신 하나님,
자신들에게는 무관심한 하나님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나도 어린 시절, 그렇게 하나님을 인식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시는가?
얼마나 무능력하신 분이신가?
그 하나님이 지금 기드온을 찾아오셨습니다.

하지만 엎친데 덮친격으로
미디안 뿐 아니라 아말렉과 동방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이스라엘의 코 앞에 진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큰 용사라 부르고 계십니다.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하고 계신듯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응하십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 적응해나갑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차이를 하나님은 전력으로 좁혀가십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적응은 오래 참으심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적응은 당신의 낮아지심으로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양털로 확증을 구합니다.
'하나님, 이것을 제게 보이십시오.'
전쟁을 앞둔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그것을 보이십니다.
그것은 기드온에 대한 하나님의 적응입니다.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다섯 번이나 확증해주셨지만
여전히 기드온의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약속과 팽팽한 긴장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용하시기 위해 오래 참으십니다.
하나님의 적응은 비단 기드온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해서도, 
모세의 여정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두려움 가운데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실 때
기드온에게도, 모세에게도,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하게 '내가 너와 함께하리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람은 그 약속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열 두 명중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악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민14:9)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 분이 얼마나 놀라운 분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적응해 나가십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 라고 하는 것은 
지나온 나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긴 시간을 통해 나를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우리를 걷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위엄으로 모든 적들을 무찌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 방식은 전혀 실용적이거나, 세련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용사를 끌어다 전쟁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기름부으시고, 그를 용사로 기르시고, 하나님께서 전쟁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드온의 질문들이 전적으로 믿음이 없는 결과입니까?
제게는 질문 없음이 더욱 믿음없어 보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묻기를 원하십니다.
다윗은 그의 전쟁에서 하나님께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올라가리이까?'
다만, 다윗은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함이라면
기드온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 근거한 것입니다.
'당신의 뜻을 돌이키시지는 않을까? 과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까? '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신실하게 응답하십니다.
그렇다면 처음 내가 가진 질문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양털이 젖기를 구해야 할까요?
그것이 응답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걸까요? 
그것이 응답되면 하나님은 무능력하신 분이 아닌걸까요?

기드온의 질문은, 그 두려움은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한 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성경은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영이 내린다.'는 정도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한글성경에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고 표현한 원어적인 의미로는 '옷을 입힌다'는 드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으로 옷을 입힌 그였지만, 여전히 그는 하나님에 대해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믿을만한 무엇을 자꾸만 요구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전쟁을 앞둔 기드온처럼 두려움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가?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 내신 것은 인정하지만,
이후의 삶을 신실하게 인도해내실 분이신가?
그래서 우리는 쉬운 결정을 내리고 맙니다.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것처럼 살아갑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기드온에게 자신의 영으로 옷 입히시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직접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심으로
예수님은 우리 안에 성령님으로 거하십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전쟁 가운데 서있다면
그 영광 가운데 질문한다면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은 침묵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바쁜 시대가 우리의 귀를 막고 있을 뿐이지,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 높아진 마음이 그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하나님은 날마다 내 마음 가운데 
당신의 소원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2:13)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있다면
기드온을 부르셨을때 약속하셨던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두려움 많던 그에게 하나님은 '큰 용사'라 부르셨습니다.
내가 나를 보는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보는 시각으로 우리는 서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전쟁 가운데 용사로 서게 하십니다. 
기드온의 전쟁은 곧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책임져서 싸워 차지할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땅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옷입은 기드온을 통해 당신의 구원을 이루셨다면,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그보다 더욱 놀라운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