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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1
아내와 가정예배를 드릴 때면
말씀과 함께 많은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게 된다.
하지만 온유와 소명이는 그때마다 우리를 가만히 두질 않는다.
목을 졸라대거나, 울며 짜증을 내고,
기도하려고 엎드린 등위에서 말놀이를 하곤 했다.
몇 번을 타이르고, 화도 내보았지만
이 아이들에게 예배시간은 야단맞는 시간이란 인상을 줄까봐 망설여졌다.
아내와 이 문제를 이야기하며 주님의 마음을 구했고,
결국 어른에게 익숙한 방식을 버리기로 했다.
주님이 놀라웁게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방식으로 가르치고 섬기신 것처럼
그리고 나를  아주 오랜시간 설득하고 기다려 주신 것처럼.
훈련과 습관이 만들어지기 까지 예배를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기로 했다.

우선 성경은 알기 쉽게 읽을 수 있는 그림성경으로 바꾸었고
찬송은 온유가 전담하고
온 가족이 돌아가며 기도하기로 했다.
아빠, 엄마는 종교적 언어가 아니라
온유가 이해할 만한 말들로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정말 전혀 예상도 못했는데,
4살 짜리 아이가 하루 하루 예배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기도할 때면
온유는 아빠, 엄마, 동생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아이는 자신의 언어에 대해 다 이해하지도 못하겠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삼촌들이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해달라고 진지하게 기도하는 것이다.
오.. 주님, 당신의 마음에 반응한 결과가 이토록 아름답다니요...


#2
즐거움, 기쁨..
이런 의미를 미학에서는 '쾌'라는 말로 사용한다.
신앙과 쾌에 대한 문제에서
우리는 쾌를 탈선적 쾌락으로 이해하는 측면이 있으며,
인간이 가진 즐거움 그 자체를 죄 가운데 두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금욕적이고
규율적인 틀 안에서 사고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인가?
실제로 우리가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어떤 즐거움이 신앙적이고, 비신앙적인가에 대해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탈선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절대적 만남 가운데 갖는 즐거움 하나가 쾌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한 조나단에드워즈도
하나님의 계시의 중요한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말한다.

중세를 거치면서 금욕주의와 이원론적인 세계관이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 정말 기독교적인가?
초기 기독교에서 서구적인 옷을 입으며
당시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하다.
반면 동로마에 영향을 받은 쪽은
이원론적이거나, 금욕적인 성향 보다는 신비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럼으로 습성화 되어 있는 금욕적 성향 자체가 진리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