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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우리의 인생에 잦은 풍랑이 있다.
그저 위협하는 정도가 아니라
배에 물이 가득할 정도로 매우 위태한 상황을 만나게 된다.
생명의 위협 앞에 울부짖게 된다.
주님과 함께 걷는 항해인데도 불구하고
그 위협은 더욱 거세게 느껴진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눅8:24)
제자들의 다급한 외침만큼이나
이 땅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환난은 심각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싱거울만큼 장면이 전환된다.
당신께서 일어나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니
거친 풍랑은 다시 잔잔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 부르짖는 것이 방법인가?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으며,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로
우리가 어떻게 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우리가 구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이루시겠지만
시대가 악해져 갈수록 그것을 믿는 믿음은 찾기 힘들 것이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18:8)

하지만 예수님께 부르짖는다는 것은, 그 믿음이라는 것은
잠들어 있는 그 분을 깨운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풍랑속에서 편안하게 잠을 청하시는
그 분은 우리의 문제에 관심없으시기에
부르짖어 우리에게로 관심을 돌리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알지 못해서 생기는 오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눅8:25)
이 항해는 믿음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탄 배는 결코 파선하지 않는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3:15)
여자의 후손, 예수님은 사단의 나라에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은 종국에 사단의 나라를 완전히 멸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것이다.
주님은 가장 결정적인 승리를 취하셨다.
하지만 패배한 사단은 여전히 위협적이다.
사단은 고작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그 아픔은 우리가 십자가를 묵상해 볼 때 알 수 있다.
자신의 멸망을 목전에 둔 사단은 더욱 극렬하게 항거할것이다.
우리가 탄 배는 결코 파선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단은 그 배를 파선시키려는 듯 위협한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그 위협은 더해질 것이다.

우리의 항해길을 걸어가며 수많은 위협앞에 눈물짓는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보며 탄식하고
자연과 세상과 불합리한 구조 앞에서 탄식한다.
관계와 현실 앞에서 눈물 짓고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무관심하신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물으신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과 함께 한 이 배는 결코 파선하지 않는다.
주님을 믿는다고 환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도 승리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풍랑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알게 된다면 
환난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가
만일, 주님을 통한 나의 구원을 믿는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영역가운데 주님의 일하심까지 신뢰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믿음에 관한 것이다.

이 배는 거라사를 향하는 길이다.(눅 8:26)
그 곳에는 무덤 사이를 거하는 광인 한 명이 있다.
거라사에는 바로 내가 있다.
이 거친 항해길 너머에 한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
말도 안되는 대가지불을 감수하고라도 그 사랑은 거침이 없다.
그 사랑은 결코 파선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