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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개강이라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집을 떠나는 버스안에서 말씀을 읽으며 묵상했습니다.
야곱은 라반과 거래를 했습니다.
얼룩이나 점이 있는 염소와 양들은 이제 야곱의 것입니다.
주변에서 부러워할 만큼 야곱은 부자가 됩니다.
하지만 라반과 그의 아들들은 곧 그를 시기하게 되었고
야곱은 곧 삼촌 라반의 집을 야반도주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미 성경을 통해 그 결론을 알고 있지만,
당시의 야곱 입장에서는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시간이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근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야곱처럼 부자가 되면 근심을 덜어버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현실적으로 덜어낼 짐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의 근심과 불안은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가지만, 속고 있습니다.
실제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미디어의 삶의 행태를 보게 됩니다.
현실에 있지 않는 감정과 삶의 장면을
실제 현실에 집어 넣으면 그 차이만큼 이격(離隔)이 생깁니다.
연애와 결혼, 살아가는 수준까지도.
성경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주변 문화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워갑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많은 두려움은 결국 내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불확실성에서 시작됩니다.
만약 야곱이 자신의 삶을 그린 성경을 미리 읽고
그 장면속에 살아간다면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과 씨름하려 들지도, 이름이 바뀌지도 않았을 겁니다.

나는 자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하지만,
정작 내 삶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내 가족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며칠전에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아내에게 말할 수 없을만큼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믿으며 함께 하고 있지만
나는 아내에게 "나를 믿어라"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 자신도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데,
누군가에게 나를 믿으라고 말한다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주님을 바라보자."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자. 주님을 바라보자는 이 말은 얼마나 가슴 벅찬 말입니까.
주님을 바라보자.
이 말은 그저 변명의 말이 아닙니다. 얼마나 실제적인 말인지요.

나는 청년시절에 결혼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과연 내가 이렇게 살아가며 가족을 책임질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 나는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두려움 많은 내게 찾아와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라반의 낯을 피해 도망하는 야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4)
_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주님은 두려워 하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아버지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 분이 내 아버지 되시기에
주님을 바라보자는 말은 결코 허망한 말이 아닙니다.

버스안에서 나는 이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42:5)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내 얼굴을 들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불안해 떨고 있을 때, 주님을 바라보는 것.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이면 충분하다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