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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야기

 


 


 


내 책상 앞에는 몇가지 신념이 적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말한 것이 내가 아니라, 살아낸 것이 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낸 것이 나를 말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가끔씩, 자주 이 말 앞에 나는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살아가면서 내 마음 먹은데로 움직여 지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음을 알게 됩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살아가며 조금씩 다윗의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장인, 사울왕에게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몇 십년을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다윗은 엔게디 광야에서 사울의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사울이 굴에 있는 동안, 그는 한 칼에 해칠 수 있었지만
그저 옷자락만 벰으로 자신이 사울을 선대하는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나발과 다윗에 대한 기사를 말합니다.
양 털을 깍는 축제의 날에 다윗은 나발에게 먹을 것을 청합니다.
들에서 양을 칠 때 자신의 목숨을 지켜준 다윗을 선대하라고 종들은 부탁하지만
나발은 자신의 종들에게 다윗에 대해 이런식으로 조롱합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삼상25:10)
나발은 분명 다윗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그는 다윗의 처지를 곡해하거나 폄하해버립니다.
마치 다윗이 사울밑에 복종하기 싫어서 도주한 것처럼 조롱합니다.
다윗은 엔게디 광야에서 자신의 목숨을 쫒는 사울을 살려주었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수하들에게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 애썼던 다윗이지만,
자신의 진실이 모욕을 당하거나, 훼손당했을 때는 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성경에 '특별히 하나님께 속했다'고 명시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전쟁과 재판, 그리고 원수 갚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대로 원수 갚으려던 찰나에
하나님은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을 돕는 자로 다윗에게 붙이셔서
피의 복수를 막으시고 실수를 모면케 하십니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삼상25:33)

살아가며,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양을 따라 살고 싶은데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내 감정과 의지의 문제를 벗어날 때도 너무 많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아플적에 나는 이렇게 기도하곤 합니다.
"주님, 우리 가정의 가장으로 나를 삼으셨는데,
우리 아이들이 아픕니다.
내가 가장으로 그것을 책임지길 원합니다.
내가 온전히 서있지 못함으로 아이들이 연약합니다.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주세요."
분명 모든 아픔들이 우리의 연약함과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육체의 질병 뿐 아니라, 모든 문제들이 이와 무관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아픔과 절망 중에도 주님으로 기뻐합니다.

내 마음대로 움직여 지지 않아서
나는 더욱 나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서
나는 더욱 주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 문제조차 내게 감사의 제목입니다.
문제가 일으키는 파고(波高)보다 주님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더욱 깊어지길 기도합니다.